[한국농어민신문]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근거는 중요하다. 이 근거는 결국 유통이나 재배 인프라에서부터 나온다. 친환경 농산물을 유통하는 영농조합에서 일한 지 어느덧 반년이 넘어가고 있는 내가 느끼는 것은 정말 친환경 농사를 지을 근거가 참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ㅣ 김현희 청년농부·전북 순창

2017년 귀농센터에서 일할 때 하우스 한 동에서 무농약 애호박 농사에 도전했던 적이 있다. 소득작목으로서의 가능성을 보려고 했던 것인데 일단 지역에 애호박을 재배하는 농가가 없으니 경쟁력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이 큰 패착이었다.

일단 지역에 재배하는 농가가 없으니 포장박스도 직접 맞춰야 했고 농자재 등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가까이에 재배방법을 배울 농가도 없어서 처음에는 비닐을 제때 씌우지 못해 팔뚝만큼 커진 호박을 주변에 팔고, 나눠주고, 썰어서 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인큐비닐에 들어가 예쁘게 채워진 애호박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는 이미 시장에 애호박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시기였다. 예쁘게 자란 애호박만 추려서 20개 한 상자를 만들어도 만원이 넘지 않았다. 직거래되는 품목도 아닌 데다 하우스 한 동이라는 작은 물량으로는 제대로 된 판로를 개척하기도 힘들었다.

그에 반해 다른 하우스 한 동에 했던 방울토마토는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직거래로 팔기 좋았고, 물량이 너무 많을 때는 가격은 좀 낮더라도 농협을 통해 공판장에도 내거나 즙을 내서 판매할 수 있었다. 작목반을 통해서는 판로뿐 아니라 재배와 지원사업 관련해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알게 됐다. 어떤 작목을 선택하더라도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구나. 애호박을 지역에서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에 길러보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실하고 잘못된 근거였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 나는 주 작목을 고구마로 정했다. 기를 때 손이 많이 가지 않는데다 황토밭인 내 땅과 잘 맞는다. 직거래하기 좋고 수확 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전까지 몇 달간 일반 창고에 쌓아두고 안정적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게 근거였다. 더 확실하게는 작년에 500평 정도를 농사지었는데 예약받은 고구마를 다 보내지 못해 원망을 들었던 경험도 올해 더 많이 지어도 괜찮겠다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이처럼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근거는 중요하다. 이 근거는 결국 유통이나 재배 인프라에서부터 나온다. 친환경 농산물을 유통하는 영농조합에서 일한 지 어느덧 반년이 넘어가고 있는 내가 느끼는 것은 정말 친환경 농사를 지을 근거가 참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학령인구가 2500명인 순창에서 친환경 학교급식 납품을 통해서 안정적인 판로를 마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신선 채소 등의 발주량이 너무 적어서, 농가에게 우리가 구입해 줄 테니 믿고 친환경으로 농사를 지으라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친환경으로 지으면 공판이나 일반 판로로 판매하기가 어렵다. 블루베리 같은 경우도 친환경은 공판에서는 잘 받아주지 않는다. 또 한살림과 같은 생협 같은 친환경 전용의 판로에 새롭게 시작하는 친환경 농가가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농사를 지은 근거는 적은데,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는 이유로 감수해야 하는 위험은 갈수록 높아진다. 건강한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음에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농약이 검출될 수 있다는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다. 드론 등을 통한 방제를 통해 밭으로 날아온다거나, 하우스 옆에 논이 있을 경우 물을 통해 오염된다거나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농산물에서 농약이 검출됐을 경우에는 즉시 판매가 중지되고, 그 사이 농가는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비의도적 혼입이었음을 소명해내야 한다. 재검사 등에 돈을 쓰고, 상관관계를 밝히고, 결과를 기다리는 등의 과정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를 옆에서 보게 된다. 농사짓는 어려움 외에도 수많은 위험과 서류작업을 거쳐야만 받게 되는 게 ‘무농약 인증’, ‘유기농 인증’이지만, 이미 이러한 인증들은 매스컴 등을 통해 불신과 조롱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작은 순창군의 사례이지만 나는 친환경 유통법인에 있으면서 왜 농가들이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친환경 농사를 할까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전에는 막연히 ‘친환경이니까 직불금도 많이 받고 뭔가 좋은 게 있겠지’, ‘더 좋은 가격으로 잘 팔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실상을 알고 보니 어려움만 가득한 게 친환경 농사라는 걸 느끼고 있다. 다들 건강한 농사를 짓는다는 자부심 하나를 붙잡고 버티고 있다.

그래서 더욱 순창에서도 친환경 농사를 지을 근거를 만들어내고 싶어졌다. 학교 급식 외에도 농가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기로 결심할 수 있는 작은 근거라도 좋았다. 그래서 작년부터 꾸러미 사업을 시작했다. 정기적으로 배송하는 꾸러미 외에도 소아당뇨꾸러미, 임산부 친환경 꾸러미 등 판로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여전히 작은 움직임이지만, 그래도 이런 시도들로 순창에도 다양한 품목의 친환경 농가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 근거가 되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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