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천 강원도 신농정기획단 연구원

어딘가에 마을 교상리가 있지 않을까 검색해 보았다. 경남 창녕군에 다리 윗동네라는 뜻의 교상리(橋上里)가 있다. 항공사진을 보니 공원에 천오백년 된 국보3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가 자리한 읍사무소와 경찰서가 있는 동네다. 전형적인 읍내 마을로 짐작되는데, 언젠가는 가보게 되려나.

오늘 제목의 교상리는 마을이 아니다. 제자백가 중에서 민중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묵자(墨子)의 ‘교상리(交相利)’다. 묵자는 민중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평생 옷 한 벌로 동분서주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사람다운 몇 가지 해법을 내 놓았는데, 사상의 핵심인 ‘겸상애(兼相愛)’는 나와 남의 차별이 없는 서로간의 사랑을 뜻한다. “우리 서로 사랑해요”라는 교리나 캠페인이 아니다. 묵자는 사랑은 반드시 물질적인 이익의 문제와 결부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서로 사랑한다는 궁극의 관계는 결국 서로 이익을 어떻게 분배하느냐의 문제, 즉 교상리의 문제라고 역설한 것이다.

묵자가 사랑과 이익을 결부시켰던 것은 분명한 실용주의적 관점이고 민중을 위한 해법이었다. 그는 성공했을까? 권력과 재력을 독점한 제후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리 없다. 잠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지지만 잊혀진 비주류 사상가로 우리에게 존재감은 없다. 궁금하다면 안성기·유덕화 주연의 중국영화 ‘묵공’을 보시라. 명작이다.

한국농어민신문 4월 기사 제목은 ‘농어촌상생협력기금 유명무실 논란, 활성화 방안은’이다. 소제목은 ‘올해 4년차, 10년간 1조 조성목표, 지난 3년간 출연액 731억원 불과’, ‘기업상생기금은 8년차 1조 돌파 대조, 경영평가 우대·정부 매칭 지원 덕분’ 등이다. 작년 말, 정부의 WTO 개도국지위 포기선언 직후에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이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로 지금까지 지지부진함은 여전하다.

농어촌상생기금은 ‘FTA 농어업법’에 근거를 두지만, 그 기금을 운영하는 조직은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법’에 근거해 중소벤처기업부가 관장한다. 연구용역보고서의 지적대로, 농어촌상생기금은 모금과 집행 부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사업개발 등에서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다. 농정과 사업을 투자유치과가 맡는 형국이니, 어떻게 돌아갈지 감이 잡힌다. 농정인 듯 농정 아닌 듯 모호하게 현장과 따로 놀 가능성이 크다. 집중력과 기획력이 이러하니 기금이 모일 에너지는 없다. 심히 안타깝다.

묵자와 같은 오래된 동양 인문정신이 오늘에도 유효한 까닭은, 오늘 우리 역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농업·농촌 부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상생과 협력이 화두였다. 민간차원의 도농교류나 농민들의 협동 속에 근근이 이어져왔다. 그 노력은 눈물겨웠으나 ‘상호간의 이익 분배의 문제’로 직시하며 냉정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전면적이지도 못했다. 결국 상생론은 지방소멸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협력은 불신의 농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상생과 협력은 조금 다르다. 수입개방으로 혜택을 입었거나 사회적 책임이 명백한 공기업 등을 포커스로 한다. 여기서의 상생과 협력은 이익의 문제, 즉 편중된 돈을 어디서 어디로 흘려보내느냐는 문제임이 명명백백하다.

모든 경제현상과 지표들 뒤에는 대한민국 농업농촌의 희생이 있다. 글로벌 경제시스템부터 우리의 평범한 저녁 밥상에 이르는 일상 이면의 희생을 직시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상생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희생을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상생과 협력의 기획이 잘 작동하지 않고 있다면, 누군가는 여전히 희생당하고 세련되게 억압당하는 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 누군가는 바로 농민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사태로 신음하고 있다. 이 고통스러운 와중에 교상리, 리(利)의 문제가 새롭게 전면적으로 등장했다. 이름이 무엇이든 모든 국민에게 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혹자는 모든 부(富)가 증발하고 있다며 이런 방식은 곤란하다고 엄살을 부린다. 그러나 돈은 여전히 국가와 기업 그리고 극소수의 가진 자들이 쥐고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의 재분배를 통한 사랑의 문제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답답하다. 글을 쓰는 이 순간까지도 국가와 정치는 총선 때 약속한 재난긴급지원금조차 어찌할지 확정하지 못했다. 강원도는 올해 예정되었던 농민수당을 내년으로 미루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돈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정권자들이 왜 어떻게 교상리를 하느냐는 의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국가재정의 건전성이 중요하든 지방재정이 늘 부족하든, 결국 그 모든 목적은 사람을 위한 것 아닌가? 옛날은 결정권자가 군주였지만 오늘은 국민이 주권자다. 그런데 국민은 나리들의 결정을 목 빠지게 기다려야만 한다. 이건 아니다.

냉해를 입은 밭에서 농민은 또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라 농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농민은 논밭에서 모두를 위한 국부(國富)를 파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익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상생과 협력은 아름다운 미덕이다. 단, 이익의 공정한 재분배를 전제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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