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이진천 강원도신농정기획단 연구원

청년농, 농업농촌에 속한 어른들의 거울
희망과 절망 속 도전하는 용기 훌륭
기성세대에 ‘바른 길’ 묻고 투쟁하길


한국농어민신문에 실렸던 청년농들의 글을 찾아 읽어본다. 훈훈한 봄날 같은, 생명력의 기운이 다가온다. 여린 들꽃을 바라볼 때의 기분 같기도 하고, 아직 가지가 풍성하지는 않아도 잘 뿌리내린 어린나무를 보는 기분도 느껴진다. 젊고 아름다운 또는 젊어서 아름다운 까닭에 느껴지는 미감일 것이다. 그러나 부러운 느낌은 곧장 부끄러움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부러움은 조금, 부끄러움은 많이.

작년 11월 강원도 청년창업농 역량강화교육에 참석한 100여명에게 객관식 질문을 던졌다. “대한민국 농업·농촌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요?” 밝고 희망적이라는 긍정적 15%와 어둡고 절망적이라는 부정적 15%를 양쪽을 두고 가운데에서 64%가 지혜로운 답변을 했다.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다. 어찌 희망만 있겠는가, 어찌 절망만 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도 물었다. “그렇다면, 농업인으로서 본인의 미래는 어떻게 전망하나요?” 재미있는 결과가 돌아왔다. 밝고 희망적이라는 긍정답변이 농업·농촌은 15%였으나 자신의 경우는 44%로 껑충 뛰었다. 어둡고 절망적이라는 부정답변도 15%에서 9%로 내려갔다. 자연히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다는 답변도 64%에서 39%로 내려갔다.

두 질문 각각은 포괄적이고 직관적인 질문이라서 분석 자료로 쓸 수 없다. 그러나 두 질문 답변의 차이는 미묘한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전망을 묻는 답변의 변화를 종합하면 이렇게 된다. “대한한국 농업·농촌의 미래는 대체로 뿌옇고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만, 청년농으로서 저는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멋지다. 일단 청춘의 패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것이 때로 무모함일지라도 괜찮다. 청년의 때에 애늙은이처럼 신중하기만 하다면 너무 심심하지 않겠나? 자신감이든 도전의식이든 청춘의 에너지는 용틀임치기 마련이다. 청년의 길을 가로막는 불의한 세력이 보이면 의로운 기운으로 싸우게 되고, 척박한 황무지에 선다면 곡괭이질을 하게 되는 것이리라.

이제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화답할 차례. 늘 관건은 어른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답할 것인가? 농업·농촌의 뼈아픈 현실과 수많은 갑갑한 지표들을 슬쩍 밀어두고, “그래, 도전해 봐”라고 답할 것인가? 아니면 나처럼 “그래, 그렇구나!”라고 부끄러운 듯 머뭇거리며 답하면 좀 덜 미안해지는가? 오십보백보, 둘 다 우스운 일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를 우습게 만들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격언이 있다. 거울을 직시하듯 아이를 보면 나의 반성할 점들이 보인다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 [참회록]에 등장하는 거울은 훨씬 생생하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청년농은 거울이다. 농업·농촌부문에 속해 밥벌어먹고 사는 모든 어른의 거울이다. 운이 좋았든 나빴든, 진실하든 등쳐먹든, 농협 빚이 있든 없든, 소농이든 대농이든, 안락했든 고통스러웠든, 그 모든 어른의 거울이 청년농이다. 시인이 밤마다 거울을 닦으면 어떤 사람이 보인다고 했듯, 청년농에게 답해야 할 어른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서서히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답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전망이 뿌옇게 된 까닭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청년들이 지닌 의문은 해소될 수 없다. 의욕이 있어도 엄두 못 내는 비싼 농지, 소득을 예측할 수 없는 농산물 유통, 치솟는 경영비에 적자농사를 키워서 굴리는 농가살림, 한껏 추켜세우지만 정작 알아서 살아보라는 마을, 농민의 표를 구걸하면서 고작 출신지 타령이나 하는 정치, 이 와중에 천문학적 융자를 약속하며 스마트팜을 권하는 정책. 청년들의 의문은 해소될 리 없다.

대체로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거울을 닦는 척만 할 뿐이다. 문제를 직시하고 청년농들에게 정확한 팩트라도 전달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른들이란 언제나 그런 부류들이었다. 이번에도 특별히 기대할 것 없다. 농업·농촌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더더욱 기대할 것 없다. 글 쓰는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거꾸로 청년농업인들에게 이런 기대를 걸어 본다. 청년 자신들의 눈으로 희망과 절망을 포착하고, 정말 많은 것들이 얽혀있고 혼재되어 있음을 파악하는 것은 참 훌륭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고 도전하는 모습은 더 훌륭하다.

그런데 왜 의심하지 않는 것이냐? 왜 질문하지 않는 것이냐? 여러분들은 왜 투쟁하지 않는 것이냐? 왜 눈 똑바로 뜨고 “이런 농업·농촌을 물려주시려는 겁니까?”라고 묻지 않는 것이냐? “어쩌자고 이런 지경까지 되었습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렇게 따지지 않는 것이냐? “당신들이 제시하는 이 길이 바른길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맞습니까?” 왜 확인하지 않는 것이냐?

거울을 닦지 않는 어른들 대신 여러분 청년농들이 스스로 거울을 닦으시라. 그리하여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참회록을 쓰도록 촉구하시라. 질문하고 투쟁하시라. 하다 하다 이런 부탁까지 하게 되어 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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