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범 여민동락공동체 대표

[한국농어민신문]

삶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는 우리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비록 가난하고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평생 살아왔던 지역에서 서로 어울리고 사람구실하며 내가 몸담고 있는 지역에서 존중 받고 살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여민동락 젊은이들의 시골행은 좀 독특했다. 대개 귀농하면 ‘농사’였는데 우리는 ‘농촌복지’에 꽂혔다. 여민동락노인복지센터를 열고 가족돌봄이 어려운 거동불편 어르신들의 아들, 딸 역할을 하면서 1년여를 바쁘지만 행복하게 지냈다. 그런데 센터 밖을 나가면 뭔지 모를 답답함과 허탈함이 늘 남았다. 묘량면 노인인구 740명 중 센터에 모시는 20명을 제외한 많은 노인분들은 지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별로 없었다. 우리도 기껏해야 간간히 찾아뵙고 말벗이나 청소에 후원물품을 나누거나 김장행사 같은 기획행사 정도를 추진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농촌은 오랜 농사로 골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져야 가는 시설복지와 그때 그때 발생하는 위기가정을 돕는 ‘사후약방문’식 복지가 대세였다. 물론 당장의 돌봄과 긴급사항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론 이 단계로의 진입을 최대한 늦춰 건강하실 때 마을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삶의 재미를 찾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 기회를 보장받아 건강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여민동락이 해야 할 농촌복지의 방향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제일 먼저 모싯잎송편 공장을 세우고 공장에 납품할 모싯잎과 동부콩을 재배하는 작목반을 순차적으로 만들었다. 지역 노인분들이 별도의 교육 없이도 자신 있게 참여할 수 있는 일자리이자 적정 수준의 소득 증대라는 목적도 있었지만 교통과 거동불편으로 박탈된 이동권을 보장해 단절된 사회적 관계망을 복원해주고 사회활동을 통해 의미있는 노후를 만드는 2차적인 목적도 있었다.

물론 뜻이 그럴듯하다고 쉽게 추진된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50여명의 어르신들과 동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와 성향이 다양하고 참여 어르신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근골격계 질환도 부위가 다 다르다. 그러다보니 모두 농사의 달인이지만 개별개별 농사 짓는 방법이 다르고 일의 속도도 천차만별이다.

7년 전쯤 노인일자리 총회 때 있었던 일이다. 일의 속도가 달라 참여 어르신들 간에 발생하는 소소한 갈등을 해소한다는 취지로 주요 안건에 “인건비를 시급에서 kg당으로 변경하자”는 안건이 올라왔다. 중간 중간 농장에서 또는 이동하는 차량에서 “언니는 좀 빨리 빨리 하소”, “니가 늙어봐라 그게 맘처럼 되나” 하며 옥신각신하던 모습이 여민동락 식구들에겐 불안 그 자체였다. 좋은 일 한다고 해놓곤 어르신들 간에 싸움을 붙이는건 아닌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안건이 올라오자 잠시 의견이 오고 가다 바로 부결되었다. 건강하고 수확량이 1등인 젊은 어르신의 말씀에 모두 동의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순히 돈 벌러 여기 온 것이 아니야.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고 늙었다고 마땅히 불러주는 데도 없지. 그런데 여기 오면 옛날 젊었을 때 만났던 지역 언니들과 수다도 떨고 밥도 같이 먹고 재밌단 말이지. 나들이에 운동도 시켜주고... 이런 맛에 오는 것이지. 만일 kg당으로 하잖아. 나중에 더 큰 싸움나고 서로 눈치본다. 하지마러. 뭐 백만원씩 버는 것도 아니고 용돈 수준인데 좀 더 젊은 우리들이 열심히 하면 되지.”

맞다. 우리가 순간 왜 이 일을 했는지 잊어 버렸다.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참여 어르신들의 지혜로 하나하나 해결해 오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우리는 차량 운행하고 어르신들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거들어 드리면서 어르신들의 애환과 눈물 속에 터득한 삶의 지혜를 큰 고난 없이 배워왔던 것 아닌가! 특히 할머니들이 쭈글쭈글한 손가락으로 사과 깎아주며 옛날 옛적 이야기를 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곤 했다. 영화가 따로 없고 책으로 써도 손색이 없었다. 물론 각자가 느끼는 주관도 많이 들어갔겠지만 현재의 우리는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10년동안 거의 매년 이 활동을 접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놓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이라도 안하면 농촌 어르신들에게 우리가 도움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여민동락 초창기 때부터 알고 지내던 어르신 두 분이 찾아오셨다. 여민동락 자원봉사부터 노인일자리도 열심히 참여하셨던 말 그대로 ‘억척’어르신들이다. 당시 ‘언니’들의 표현에 의하면 “젊은 새댁”에 속했던 60대 중반이었는데 벌써 70대 중반이 되셨다. 그런데 두 분 다 이제 몸이 불편해 받아 주는 데가 없다고 하소연 하신다. 그나마 있는 농사도 다 내놓았고 살기가 막막하다는 것이다. 여러 사정상 수급자도 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농사일 뿐이니 뭔가 해보시겠다고 하신다. 바로 여민동락 농장과 동락점빵 식구들이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일감을 만들고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청년들이 마을 목수에게 기술을 전수받아 두 분의 일자리 전용 의자도 만들었다.

최근 농촌 어르신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다양한 정책과 제도들이 나오고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긴 하다. 다만 도시와 달리 농촌은 여전히 취약하기 이를 데가 없어 재정을 기반으로 한 제도와 정책으론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삶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는 우리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비록 가난하고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평생 살아왔던 지역에서 서로 어울리고 사람구실하며 내가 몸담고 있는 지역에서 존중 받고 살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여민동락은 더욱 사람중심, 관계 중심의 지역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에 매진한다. 이것이 농촌복지의 바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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