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이진천 강원도신농정기획단 연구원

농업·농촌의 공익기능 언급 때마다
농정 실패 몸으로 겪은 농민 불신 당연
국민이 지친 그들에게 다가가야


그동안 전국귀농운동본부와 춘천두레생협 그리고 친환경농업인연합회 등을 통해 현장을 만나왔다. 요즘은 강원도 협치조직에 합류해서 지역농정의 변화를 모색 중이다. 하지만 날로 고민만 깊어진다. 농정은 개혁될 수 있을까? 크게는 농정 틀을 바꾸는 철학과 구조의 문제부터 작게는 변화를 도모할 사람 하나 없는 마을의 현실까지,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더구나 개혁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태도와 입장은 간격이 크다. 개혁 가능성을 전망해 보라면 뭐라고 답할 자신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농정의 방향을 이야기한다.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실마리가 되어 꽉 막힌 현실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은 합리적이다. 저마다 생각을 쏟아놓는 것이 당연하다. 농민은 투박하고 절절한 외침으로, 관료는 무심한 시책문서로, 연구자들은 건조한 자료와 도표로, 시민이자 소비자들은 나름의 트렌디한 견해로.

최근 농정의 방향을 논할 때마다 새삼 언급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이다. 공익적 기능은 공익적 가치로도 불리고 있으며, 범주가 다른 다원적 기능과 혼용되기도 한다. 엄밀하게 따지면 잘 구분해야 하는 것이겠지만, 오늘의 주제는 아니다. 아무튼 새로운 직불제도의 이름부터 시·군의 조례까지, 많은 논의와 구체적인 제도의 변화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5월에 시행될 ‘공익증진직불법’ 1조 목적은 ‘농업·농촌의 공익기능 증진과 농업인등의 소득안정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강원도농어업인수당지원조례안’ 또한 ‘농어업과 농어촌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공익적 기능을 증진하기 위하여’라고 목적을 밝힌다.

공익기능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공익기능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해야 할 터. 12년 전 ‘농업식품기본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등장한 법률 3조 9항의 ‘농업·농촌의 공익기능 정의’ 6개 항목은 이렇다. ①식량의 안정적 공급 ②국토환경 및 자연경관의 보전 ③수자원의 형성과 함양 ④토양유실 및 홍수의 방지 ⑤생태계의 보전 ⑥농촌사회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의 보전.

가정을 해 본다. 위와 같은 공익기능 하나하나가 농정의 방향이 되고 농정이 펼쳐지는 현장 구석구석에 접목된다는 가정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농정이 가리키는 오늘의 숫자는 비록 참담하더라도, 내일과 미래를 참고 기약할 수 있다. 그런데 가정에서 확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한국사회가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관문이 있다. 바로 불신의 문제.

공익기능이 강조된다고 고개 끄덕이며 수긍할 농민은 없다. 공익기능의 첫 번째가 ‘식량의 안정적 공급’ 아니었나? 그 기능이 체계화된다는 것은 농민의 살림살이가 농사로 온전히 안정되어야만 가능한 것 아닌가? 농가경제와 농촌살림이 불안정하다면 안정적 공급 따위는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 거꾸로 식량의 안정적 공급을 바란다면 농가와 농촌의 살림살이가 이 지경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오랜 세월동안 농정은 공익 증진에 실패했다. 그 실패를 농민은 몸으로 겪고 감당하고 있으므로, 농업·농촌의 공익기능이 언급될 때 농민이 보이는 불신과 냉소는 농민의 이해력 부족 탓이 아니라 당연한 반응이다.

불신의 관문은 농민 말고 다른 사람들이 극복해야할 숙제다. 도시민·소비자·국민으로서, 혹시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공익기능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생태계·자연경관의 보전’을 강조하면서 농민을 공익 수행에 게으른 사람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간단하지도 않고 논의가 숙성되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공익기능이라는 것이 아직은 합의된 약속이 아니라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현재까지는 그렇게 보인다.

불신을 극복하고 신뢰사회로. 뻔한 캠페인 구호처럼 들리지만 믿음에 근거하지 않은 개혁은 공허할 뿐이니 다른 길은 없는 것 같다. 답답한 나머지 옛 글을 뒤적이다가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다. 믿을 신(信)에는 이틀 밤을 묵는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동양고전 ‘시경’에서 유래한다. “손님이 이틀 밤을 묵고 묵으니, 끈을 주어 그 말을 동여매리라”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의 집에서 이틀 밤을 묵는 것은 분명 남다른 믿음의 관계다. 믿음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고 2박3일이면 믿음은 더욱 돈독해진다.

농가에 하루 밤 묵은 적은 많지만, 이틀 밤을 묵은 기억은 서너 번 정도 있었다. 농가에서 이틀 밤을 묵는다는 것은 하루 밤과 전혀 다르다. 하루 밤은 낮에 도착해 서로 안부 묻다가 늦게까지 술 마시고 오전에 일어나 떠나기에 바빴다. 이틀 밤은 다르다. 첫날밤에 술과 이야기를 조절하고 다음날 새벽부터 밭에서 일을 거들면서 생생한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서로 공유했다. 일하다 마신 술이 진짜 농주였고 두 번째 밤의 정담은 훨씬 깊었다. 남다른 믿음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요즘처럼 저마다 바쁜 시절에 농민과 이틀 밤을 지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회복과 새로운 믿음의 형성을 바란다면 이틀 밤은 보내야 한다. 불신이 깊었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믿음이라는 기쁨과 힘으로 되돌아올 것임을 상징한다. 농업·농촌의 공익기능이 제대로 작동되는 농정은 믿음이라는 밭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지금 믿음의 문제는 국민들이 지친 농민에게 다가가야 하는 문제로 넘어와 있다. 이틀 밤의 시간을 낼 수 있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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