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빛 띠는 ‘화산배’…“단맛이 화산처럼 뿜어져 나와요”

[한국농어민신문 조영규 기자]

▲ (왼쪽)전남 나주 반남지역에서 유일하게 화산을 재배하고 있는 유경상 씨. 맛 하나만 믿고 화산에 열정을 쏟는 중이다. (오른쪽)배연구소에는 우리나라 화산 원목이 있다. 강삼석 배연구소장이 전국에서 유일한 화산 원목을 설명하고 있다.

고전소설 ‘춘향전’에 ‘청실배’가 등장한다. 월매가 이도령에게 차려준 상 위에 ‘청실배’가 올려지는데, 배가 진귀한 과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청실배’의 ‘청’을 닮은 배가 있다. ‘화산’이 주인공. ‘청실배’의 색깔이 청색이듯, ‘화산’도 푸른빛을 띤다. 간혹 덜 익은 배로 오해받지만, 잘 익어도 푸른색이 남아있는 배가 ‘화산’이다. 배는 신맛이 거의 없는 만큼 고급스러운 단맛이 특징으로, 특히 수분이 85% 가량이어서 단맛이 깔끔이다. ‘화산’은 이런 배의 장점을 충분히 갖춘, 그러면서 석세포가 적어 식미가 우수하다. 모양은 예쁘지 않아도, ‘맛으로 승부한다’는 ‘화산’. 추석용 과일로서 ‘원황’과 ‘신고’를 이어주는 역할로 주목받고 있다.

풍수와 신고 결점 보완
신고보다 추석 출하에 유리
꽃눈 잘 생기지 않는 탓에
선진농가서만 재배 가능

과피에 초록색 남는 단점
‘신선함·차별화’로 극복
배 재배 감소세 속에도
재배면적 늘리며 수출까지

#‘신고’의 결점을 보완한 품종, ‘화산’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현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배 교배육종을 시작하기 전 우리나라 배 품종은 ‘장십랑’, ‘만삼길’, ‘풍수’, ‘신수’ 등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본 육성품종으로 우리나라 기후와 토양에 적합하지 않았다. 1954년 원예시험장이 배 교배육종을 추진한 결과, 1969년 우량 중만생종 ‘단배’를 시작으로, ‘황금’, ‘추황’, ‘감천’ 등을 육성했다. 이런 가운데 추석용 배가 필요했다. 배 소비 정점이 추석인데, 추석용 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신고’ 수확시기는 9월말~10월초여서 이른 추석에는 수확이 어려웠고, 그나마 추석용으로 재배되던 ‘장십랑’은 모양은 예쁘지만 맛이 덜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풍수’를 도입했는데, 중부지역에서는 성숙적산온도 부족으로 성숙도가 떨어져 신맛과 떫은 맛이 나고 착색 역시 좋지 못했다. 중부지역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추석용 배를 만들자는 노력의 결과물이 ‘화산’인 것이다.

강삼석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장은 “황갈색 과피색, 수려한 외관과 풍미, 추석 출하가 가능한 숙기, 부드러운 육질, 고당도의 ‘풍수’와 강한 저장력, 치밀한 육질의 ‘만삼길’을 조합해 전국적으로 안정적인 재배가 가능한 추석용 품종을 만들고자 했다”고 ‘화산’을 설명했다. ‘화산’의 평균 과중은 540g, 당도는 12브릭스 내외이며 수확시기는 9월 25일(나주)에서 10월 3일(수원)경이다.

1982년 원예시험장에서 ‘풍수’와 ‘만삼길’을 교배한 이후 교배 7년차인 1988년부터 지역적응 연락시험을 실시했다. 전 지역에서 맛이 뛰어나고 외관이 수려하며 ‘풍수’와 ‘신고’ 사이에 출하돼 ‘신고’보다 추석 출하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과피흑변 현상도 없어 ‘신고’의 결점이 보완된 우수품종으로 인정, 1992년 ‘화산’으로 명명 보급하게 됐다. ‘신고’의 결점을 보완한 품종에 대해, 김윤경 농진청 농업연구관은 “‘신고’는 성숙기에 강우가 많은 해에는 과피흑변이 저온저장고 등에서 발생함으로써 외관이 불량해져 상품가치가 저하되고 수출할 때도 문제가 될 뿐 아니라 바람이 드는 현상도 나타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시급했다”고 당시 상황을 언급했다. ‘풍수’와 ‘신고’의 결점을 보완한 배가 ‘화산’이었다.

#꽃눈 달리기도 어렵고, 색은 초록색이 남아있고

그렇다고 ‘화산’이 빠르게 퍼지진 않았다. 재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배 착과를 결정하는 꽃눈여부가 사실상 한 해 농사를 좌우하는데, 그 꽃눈이 ‘화산’에는 잘 생기지 않는다. 강삼석 소장은 “보통 배가 하나 달리면 배 양 옆으로 꽃눈이 두 개가 생기고 이 두 개가 2년 차가 되면 네 개가 생기는데 이렇게 잘 생기는 품종이 ‘신고’라면 ‘화산’은 꽃눈 두 개가 생겨야 할 게 하나밖에 안생기고 또 열매가 많이 달릴 때는 이마저도 안생긴다”며 “흔히 ‘이빨빠진다’고 하는데 꽃눈이 생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면 그만큼 손이 많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신고’는 가지 하나를 만들면 짧게는 7년, 길게는 10년까지 사용하는데 비해, ‘화산’은 3~4년 지나면 바꿔줘야 한다. 그만큼 일손이 더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화산’은 ‘색’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강삼석 소장은 “‘화산’은 다 익어도 과피에 푸른색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시장 기준으로는 덜 익은 배로 보였다”고 설명했다. 강 소장은 “시간이 지나면 갈색으로 색이 변하긴 하지만 이때까지 기다렸다가 배를 따면 배가 완숙돼 금방 상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며 “최근에는 ‘적숙기’에도 과피에 초록색이 남는다는 것을 농가에 알려주면서 수확기를 열흘정도 앞당겨줬고, 초록색이 남아있는 배를 ‘신선하다’고 보는 시선이 점점 늘고 있어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만개 후 150일 전후해 수확하면 상품성이 있는 ‘화산’ 유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강 소장의 얘기다.

‘화산’의 과점도 고민거리였다. 과점은 숨쉬는 구멍이 과실에 남은 흔적인데, ‘화산’은 과점이 다른 배들보다 크다. 농가들이 “처음 ‘화산’을 보면 징그럽다고 생각하는 소비자들도 있다”고 말한 이유가 ‘과점’ 때문이다. 오히려 농촌진흥청은 ‘화산’의 과점을 마케팅에 활용했다. 강삼석 소장은 “‘화산’의 과점은 크고 선명해서 소비자들이 다른 품종과 쉽게 구분할 수 있다”며 “이런 독특함을 앞세우면 ‘화산’이 더 눈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일환으로 농진청은 ‘화산’ 전용상자를 만들었다. 김윤경 연구관은 “‘화산’의 큰 과점을 물방울 무늬로 표현했고, 가을에 익는 배를 표현하기 위해 갈대그림을 넣었고, ‘비 갠 과수원에 잎은 푸르고 진한 여름햇살에 맛이 영글다’란 문구도 넣으면서 ‘화산’에 감성을 입혔다”고 밝혔다.

#옛날에 먹던 배맛, ‘그래서 공들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재배가 힘든 ‘화산’. 그래서 ‘화산’을 선택한 농가는 배농가 중 선진농가로 꼽힌다. 전남 나주시 반남면의 유경상 씨가 그 중 하나다. 반남 인근의 배 농가 중 ‘화산’을 재배하는 농가는 유 씨가 유일하다. 약 1만1570㎡(3500평) 중 3300㎡(1000평)가 ‘화산’이다. 묘목수로 따지면 330여 그루. 유경상 씨는 귀농해서 배 농사를 시작할 때부터 신품종에 관심을 가졌다. 귀농으로 새롭게 농사를 짓는 만큼 자신만의 경쟁력을 키우려면 기존의 ‘신고’와는 차별화된 ‘품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때 선택한 것이 ‘화산’이었다. 맛 때문이었다.

유 씨는 ‘화산’이 옛날에 먹던 배맛과 같았단다. 유 씨가 ‘화산’을 맛보고 처음 내뱉은 얘기였다. 유경상 씨는 “‘화산’이 우리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배의 맛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 맛이면 충분히 배 농사로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던 유 씨. ‘재배가 까다롭다’는 농촌진흥청의 얘기에, 유 씨도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까다로운 이유도 비슷했다. 유 씨도 “꽃눈을 위한 결가지 확보에 신경을 써야 하니 일하기가 사납고, 특히 유과기 때 수분조절을 못하면 열과가 많이 발생한다”며 “‘신고’는 보통 관수를 안해도 되는데, ‘화산’은 2~3회를 할 정도로 수분을 항상 유지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맛이 보장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화산’을 재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화산’의 맛은 소비자들로부터 인정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화산’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 중 배연구소가 운영한 ‘배 신품종 서포터즈’ 반응이 호평 일색이었다. 한 서포터즈는 ‘상자를 열었을 때 껍질 색깔이 푸른색이 더 눈에 들어올 정도로 덜 익은 배 모양을 하고 있어 놀랐다’면서 ‘아이들의 표현 그대로 화산을 한 입 베어먹으니 단맛이 화산처럼 뿜어져 나왔어요’라고 표현했다.

#배 산업을 잇는 물꼬 역할

배 재배면적과 생산량 모두 감소추세다. 이런 분위기와 달리, ‘화산’은 조금씩 기세를 넓혀가고 있는 모습이다. 최정범 나주시청 기술지원과 팀장은 “국내 육성품종인 ‘화산’이 유일하게 재배면적을 늘려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확기가 9월 하순이어서 ‘원황’ 수확 이후부터 ‘신고’ 수확 전까지 맛볼 수 있는 고품질 배가 ‘화산’”이라며 “‘화산’은 수확작업 분산으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품종이면서, 크기에 관계없이 당도가 좋고 가식부위가 많아 한번 먹어본 소비자들이 다시 찾는 배 역시 ‘화산’”이라고 말했다. 최정범 팀장은 “대부분 수출과 직거래로 출하됨으로써 판로도 안정적이어서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있다”며 “이처럼 ‘화산’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다”라고 밝혔다.

강삼석 소장은 ‘화산’ 재배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따. 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점차 추석이 갖는 의미가 퇴색되면서 제수용 배, 외관이 좋고 크기가 큰 배를 선호하는 현상이 줄어들고 있다”면서 “이전에는 성장촉진제를 통해 배 숙기를 무리하게 앞당겨 ‘신고’가 ‘화산’의 자리를 빼앗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성장촉진제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화산’이 설 자리가 온전히 생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래도 여전히 배 시장은 추석이 좌우한다. 추석에 배가 맛있으면 추석 이후에도 제값에 잘 팔리고, 그렇지 않으면 추석 이후엔 안팔린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원황’과 ‘신고’를 이어주는, 그러면서 추석 이후의 소비까지 책임지는 배가 ‘화산’이다. 추석에 출하되는 ‘화산’의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이유다. 강삼석 소장은 “‘화산’은 배 전체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시기인 ‘추석’에 출하되는 배이자, ‘원황’과 ‘신고’ 사이를 메워주는 배라는 점에서 배 산업이 안정적으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물꼬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나아가 ‘신고’에 집중돼 있는 편중현상도 생산자와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얻은 ‘화산’이 해소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조영규 기자 choyk@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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