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위원, 농정전문기자

[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이번 정부의 개도국 지위 포기 결정에 대한 비난이 들끓는다. 각 나라의 자주적 권한인 개도국 지위는 농업을 보호할 마지막 보루인데도, 너무 쉽게 이를 포기한 정부 결정에 농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개도국 지위 포기라는 엄청난 결정을 하면서 내놓은 대책도 대책이라 하기엔 너무 부실한 것도 분노를 키우고 있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이번 결정이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니라, 미래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는 정부 논리다. 정부는 개도국 문제는 차기 협상부터 해당되는 일인데, 마치 언론이나 농민들이 오늘 당장 우리나라가 개도국 지위를 상실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원래 우리나라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때 농업은 개도국 지위에 맞춰, 그 외 분야는 선진국 수준에 맞춰 이행계획서를 냈다. 그리고 그 개도국 지위는 5년이든, 10년이든 새로운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당연히 유지된다. 그걸 농민들과 언론이 모를까. 우리 농업을 위한다면, 차기 협상에서도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할 정부가 미국에 굴복해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해 놓고 엉뚱하게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는 말과 내용적으로 뭐가 다른가?

전형적인 곡학아세다. 그동안 통상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일방적으로 생존권을 빼앗기고, 이제는 개도국 지위라는 미래 희망도 빼앗겨 엄동설한에 아스팔트로 나선 농민들의 눈물이 참담하기만 하다.

또 하나, 정부가 개도국을 포기하면서 대응방향이라며 내놓은 대책도 한심하다. 공익형직불제, 재해복구비, 농업재해보험, 로컬푸드, 임산부 친환경 농산물 지원, 채소류 가격안정제, 청년 후계농 정착 지원금, 한국농수산대 강화 등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이미 추진되고 있는 정책을 재탕한 것뿐이다. 위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년 농업 예산을 최근 20년 내 최고 증가율인 4.4%로 15조3000억원을 편성했다고 하지만, 전체 예산에서 농업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2.98%로 3%대마저 무너졌다. 이전 정부 때 2017년 예산이 3.62%였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18년 3.38%, 2019년 3.12%로 감소해왔다.

공익형직불제를 대책인 양 내세우지만, 공익형직불제란 것은 애초 경쟁과 효율만 강조해온 농정을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추진해 온 것이지, 개도국 포기 대책으로 포장될 것이 아니다. 차기 협상까지 앞으로 상당기간 개도국을 유지한다는 정부 설명대로라면, 감축대상보조(AMS)라며 없애려는 쌀 변동직불금도 그 기간 동안 줄여야 할 이유가 없다.

공익형직불제 예산으로 예산 2조2천억원을 반영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2017년 쌀 직불금, 친환경·조건불리·경관보전·밭 직불 관련예산 2조6000억원보다 적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농정TF팀이 제시한 예산도 2022년까지 5조2000억원 규모였다. 5조2000억원이 되려면 내년 예산을 3조원 이상으로 하고 매년 1조원 이상씩 늘려야 가능한데도, 향후 예산 증액에 대한 말은 전혀 없다.

이전 정부들은 UR 협상 타결, FTA 체결 등 대형 통상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농민 보호를 위해 42조 구조개선 대책, 45조 농촌발전계획, 119조 대책 등, 짜 맞추기식 예산이라도 제시하는 시늉이라도 했었다. 하지만 이 정부는 개도국 포기라는 엄청난 결정을 하면서도, 추가 예산 한 푼도 내놓지 않았다. 국익이란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농민을 희생시켰다면, 그에 상응한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게 포용국가 아니던가?

‘농업 경쟁력 강화 정책방향’이라는 대책의 제목도 수긍이 어렵다. 대책에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볼 만한 게 없기도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경쟁과 효율 중심의 농정을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바꾼다고 공약하고, 이를 위해 대통령 직속의 농특위까지 만들지 않았나. 문재인 정부 농정은 다시 이전 정부의 ‘경쟁력 강화 정책’으로 전환하겠다는 뜻인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재탕 정책에 예산 뒷받침도 없는 발표를 보면서, 농민과 농업을 무시하는 ‘농업 패싱’의 결정판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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