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개도국 지위 포기 파장

[한국농어민신문 고성진 기자]


정부가 농업 분야의 WTO(세계무역기구)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면서도 당장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했다. 각계의 원성은 물론 철회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줄을 잇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농업 경쟁력 제고 대책에 대해서도 비판이 거세다.


수입 자동차에 고율 관세 부과
대상국 발표도 안 났는데 ‘포기’
미·중 무역마찰 희생양 자처한 셈

WTO 협상 재개 불투명해도
미국과 양자 협상 반영 가능성
농업분야 피해 더욱 커질 듯

‘공익형직불제’ 조속 도입 등
정부 제시 농업 경쟁력 방안도
기존 정책 보완 수준 머물러 

농민단체 대정부 투쟁 예고
정치권도 ‘즉각 철회·사과’ 촉구


▲농업 현실 외면, 또다시 ‘희생 강요’=홍남기 경제부총리(기획재정부 장관)는 10월 25일 정부서울청사 별관 브리핑룸에서 열린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이번 결정은 △대외적인 위상 감안(G20, OECD회원국,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모두 충족) △개도국 특혜 관련 대외 동향(향후 WTO 협상에서 개도국 혜택을 인정해 줄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결정이 늦어질수록 대외적 명분과 협상력 모두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및 대응여력 등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결정은 미국이 수입 자동차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 대상 국가를 발표하기 전에 나왔다는 점에서 사실상 농업 현실을 외면한 채 주력 수출산업의 이익을 위해 ‘농업 희생’을 또다시 강요하면서 스스로 미국과 중국 간 무역마찰에서 희생양을 자처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농업개혁위원회는 28일 “WTO 개도국 지위 포기는 국민에 대한 안정적인 식량 공급과 농가경제 안정을 위한 정책적 한계를 스스로 떠안은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면서 “더구나 미국과 중국 간 무역마찰에서 비롯된 미국의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압박에 정부는 스스로 희생양을 자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얘기한 대로 과연 미래 협상에서 문제가 없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크다. 서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월 24일 민주당 정책조정회의에서 “정부는 개도국 지위 상실로 인해 당장의 영향이 없다고만 했지 향후 예측 가능한 문제에 대해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농업계 관계자도 “WTO 미래 협상 재개가 불투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이번 결정이 다자간 협상이 아니라 미국과 양자 무역협상에서 반영될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렇게 되면 농업 분야의 피해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실련 농업개혁위원회도 “농민단체 등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대화와 소통도 없이 또 다시 농업에 희생을 강요하는 공정하지도 않고 형평성도 없는 졸속적인 정책 추진”이라면서 “미국 통상압력의 첫 단추가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일 수 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어 다른 단추까지 열어줘야 하는 비관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강조했다.

▲진정성 없는 ‘짜맞추기 정부 대책’=정부는 향후 대응 방향으로 △미래의 WTO 농업 협상에서 쌀 등 국내 농업의 민감 분야를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 △미래의 WTO 농업협상 결과 국내 농업에 영향이 발생할 경우 피해 보전대책을 반드시 마련하겠음 △우리 농업의 근본적인 경쟁력 제고를 위한 대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음 등 3가지를 제시했다.

세부 방안도 제시됐다. 정부가 특히 강조한 부분은 ‘공익형직불제’의 조속한 도입이다. 정부는 “공익형직불제는 WTO에서 규제하는 보조금에 해당되지 않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정부는 내년 예산에 공익형 직불제로의 전환을 전제로 직불금 예산안을 대폭 증액(2020년안 2조2000억원)해 국회에 제출했다. 향후에도 직불금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잇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또한 정부는 △농업재해보험제도 개선 △로컬푸드 소비기간 마련을 위한 지원 확대 △주요 채소류에 대한 가격안정제 지속 확대 △품목별 의무자조금을 활용한 농산물 가격안정기능 강화 △청년·후계농 육성 적극 추진 △농업 재원 확보에 만전 등을 제시하며, “아울러 앞으로도 농업계, 전문가 등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농업경쟁력 대책을 지속적으로 추가·보완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도 ‘졸속 대책’이라는 비난이 크다. 기존 농업 정책의 개선 의지만을 피력했을 뿐 특별할 게 없는 대책이라는 것이다.

고문삼 한국농업인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공익형 직불제의 경우도 WTO 개도국 지위 문제가 불거지며 이에 따른 대책으로 부각된 양상이지만, 사실상 이 문제와는 별개로 추진돼 왔던 것인데 짜맞추기식 대책으로 발표된 것”이라며 “농민 의견을 애초부터 수렴해 대책을 마련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발표 시점이 다가오자 부랴부랴 농민 단체들과 간담회를 하는 모습을 연출하기에 급급했다.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졸속 대책’”이라고 일갈했다.

앞서 농민 단체들은 WTO 개도국 지위 관련해 정부 약속 이행 및 세부 시행방안 논의를 위해 범부처와 민간이 공동 참여하는 특별위원회 구성 등의 내용을 담은 6대 요구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세부 내용은 △국가 전체예산 대비 농업 예산 비중 4% 이상 확보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정상화와 1조원 조성방안 제시 △공익형직불제 예산 3조원 이상 확보 △직불금 중심 농정 실현을 위한 중장기 대책 즉각 수립 △농식품바우처사업 전면 도입 △임산부친환경꾸러미·과일급식·아침밥급식 확대 시행 △수입보장보험 확대 시행 △농산물의 근본적인 수급안정대책 마련 △농작물재해보험 전면 개혁 △농업자금 정책금리 인하 △후계농 육성 법제화 △농지제도 근본적 개혁안 마련 등이다.

▲농업계와 정치권 반응은=정부의 결정이 농업·농촌을 외면하는 동시에 식량주권과 통상주권의 포기를 선언한 것이라는 규탄의 목소리가 줄을 잇는다. 개도국 지위 포기 방침의 즉각적인 철회를 요구하는 한편 농민 단체들은 대정부 투쟁을 예고하고 나섰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성명서를 통해 “농업계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번 결정에 14만 한농연 회원을 비롯한 250만 농업인은 분노와 울분을 금할 수 없다”면서 “정부의 농업 홀대에 더는 정부의 농정 방향을 신뢰할 수 없다. 추후 상경집회 등을 통해 농업의 뜻을 전달할 계획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농업인단체연합은 성명에서 “대선 당시 ‘농업을 직접 챙기겠다’던 대통령의 약속은 국민을 위해 지켜질 공약(公約)이 아닌 그저 허울뿐인 공약(空約)이었다”며 “정부는 농산물 가격폭락과 태풍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논밭, 아프리카돼지열병까지 피를 토하는 농민을 위로하고 보듬기는커녕 쓰리디 쓰린 농민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경실련 농업개혁위원회는 “출범 초기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의 농업분야 공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선언으로 설상가상의 어려움을 겪게 됐다”며 “정부는 졸속적인 개도국 지위 포기 방침을 즉각 철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격앙된 반응은 정치권도 못지않았다. ‘WTO 개도국 지위 유지 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의 황주홍 위원장은 긴급성명서를 통해 “‘24년간 유지해온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다는 것은 국내 다른 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농업 분야의 피해를 최대화하겠다는 판단에 다름 아니다”라며 “정부 발표가 매우 잘못된 판단이며, 이제라도 정부가 초심으로 돌아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 줄 것을 진심으로 촉구한다”고 밝혔다.

김종회 무소속 의원은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 결정을 당장 철회하고 부당한 압력에 주권과 농업을 포기한 것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성진 기자 kosj@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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