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에서 개도국(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작정한 모양새다. 정부는 당초 개도국 지위와 관련된 입장은 결정된 바 없으며,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다가, 점차 시한이 다가오자 개도국 지위 포기에 방점을 찍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26일 행정명령을 통해 WTO의 개도국 지위 관련, ‘자기선언 규칙’을 수정하고 60일내에 보고하라고 했다. 또 90일 이내에 성과가 없다면, WTO 규칙이나 협상에서 특정국가의 개도국 지위 부정,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거부, 미국의 안보 무역 경제관련 기구와 공동조치, 부당하게 개도국 지위를 누리는 국가 명단 공표 등의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 시한이 10월23일이다.

정부는 10월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결정할 계획이라고 하지만, 그동안 정부가 통상협상에서 ‘국익’을 내세워 취해온 태도와 ‘워딩’(표현법)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은 ‘포기’로 읽혀진다. 정부 설명은 개도국을 어떻게 지킬 것이냐가 아니라 개도국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부는 지금 개도국 지위를 포기해도, 현재의 관세와 보조금 수준에는 영향이 없고, 차기 WTO 협상에 해당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다는 것은 향후 협상에서 농업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포기하고 무장을 해제한다는 것과 같다. 이는 농업의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WTO의 논의를 감안하면 개도국 포기 시 농업피해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다.

개도국은 선진국보다 농산물 관세를 20%가량 덜 깎을 수 있고, 전체 농산물 세번(HS)의 12%를 특별품목으로 지정해 그 가운데 5%까지는 관세감축 면제를 받을 수 있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특별품목을 활용하지 못한다. 쌀·고추·마늘 같은 주요 농산물의 관세를 대폭 깎아야 한다. 개도국 지위에서는 농업보조총액(AMS)을 연간 1조4900억원까지 쓸 수 있었지만, 이를 포기하면 7000억원대로 떨어진다.

개도국 지위는 순전히 각 나라의 주권에 속한다. WTO 협정에서는 개도국 지위는 회원국이 ‘자기선언’을 하는 방식이다. 개도국 대우를 적용한 이행계획서를 제출하면 이를 회람, 검증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WTO에서 우리나라는 농업을 개도국으로 인정 받았고, 다른 분야는 이미 선진국 기준으로 관세 등을 부담하고 있다. 트럼프의 요구는 국제 규범조차 무시하는 행위다. WTO를 무력화하고 보호무역을 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국제기구에서 얻은 개도국 지위를 트럼프의 말 한 마디에 포기한다면 주권국가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가 트럼프 압력에 따른 것이란 비난에 직면하자 ‘국익’이란 프레임을 들고 나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WTO에서 우리나라의 개도국 특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아져 향후 개도국 특혜를 유지할 수 있을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국익을 우선해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국익이란 말로 FTA를 강행하고, 쌀 시장을 전면 개방하던 그 논리다. 2005년 추곡수매를 폐지할 때는 보조금을 감축해야 한다며 WTO 규정을 내세우더니, 이번엔 WTO 대신 ‘국익’이다.

무엇보다 한국 농업은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 WTO가 출범하던 1995년에 견주어 한국농업의 현실은 나아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농업소득은 1995년 1046만9000원이었지만 20년 뒤인 2015년에는 1125만7000원이 됐다가 2017년에 1004만7000원으로 오히려 줄었고, 2018년에는 1292만원으로 늘었지만, 추세적으로는 1000만원대에서 횡보를 거듭하고 있다. 실질소득으로 본다면 WTO 출범 이후 농업소득은 감소한 셈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실질 농업소득은 2018년 957만5000원으로 1000만원도 안된다. 10년 뒤인 2028년에는 879만5000원으로 떨어질 것이다. 도시근로자가구 대비 농가소득의 비율은 1995년 95.7%에서 2018년 65% 수준으로 줄었고, 2028년에는 62.5%로 감소할 것이다.

곡물자급률은 1995년 29.1%에서 2018년 21.7%로 떨어졌다. 이는 OECD 회원국 중 꼴찌다. 농축산물 무역적자가 세계에서 6번째로 크다. 우리나라 농가인구 감소폭은 OECD 가운데 최대이다. WTO 출범 이후 농업은 나아진 것이 없다. 거듭되는 농산물 가격폭락에 스스로 삶을 등지는 농민들이 속출하는 현실이다. 우리나라 농업은 개도국이다. 개도국 졸업과 관련해 어떠한 원인 발생도 없다. 어디를 보아서 우리 농업이 선진국이란 말인가?

헬조선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나라가 국민소득 3만 달러라고 선진국인가. 농사 지어서 실질소득 1000만원이 안 되는 나라의 농업이 선진국인가?

지금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부가 사실상 미국의 보복이 두려워 개도국을 포기하려면서도 농업피해에 대한 대책을 언급하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우리 농민은 안보이고 미국만 보인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국익을 지킬 수는 없다. 트럼프는 자기 나라 국민과 산업을 지킨다고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부는 부당한 압력에 굴할 것이 아니라 주권을 지키고 농민을 보호해야 한다. 농민을 포기하면서 포용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