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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2030, 그들이 사는 법] 가을장마

[한국농어민신문]

비바람이 걷히고 해가 떠오르자 도열병 피해를 입은 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도열병은 한 번 발생하면 회복이 어려워 출수 시기가 되면 예방 차원에서 농약을 살포하라고 권장하는데, 유기농 벼논에는 그럴 수 없으니 손을 쓰지 못하고 고스란히 피해를 입게 될 상황이다.


고요한 시골마을에 차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이 되자 옆집 할머니 댁에도 승용차 네 대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서 객지에 사는 자녀들이 찾아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담을 넘었다. 오랜만에 뵙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평소 연락이 뜸했던 마을 형님들과 담소를 나누는 소리는 멀리서도 정겹게 들렸다. 하지만 한가위 풍경이 모두에게 온기 어린 것은 아니었다. 마을에는 어르신들이 돌아가셔서 더 이상 찾아오는 이가 없는 빈집도 여럿 있고, 안주인이 떠난 뒤 명절이면 도시에 사는 자녀들이 홀로 된 아버지를 모시고 귀경해 대문이 굳게 닫힌 집도 있다. 그런 탓에 오랜만에 내려온 손주 녀석들로 시골 마을이 평소보다 소란스럽긴 한데, 흥성흥성 북적이던 옛 풍경에는 비할 수는 없다.

명절을 맞아 자식들과 손주들은 모처럼 들뜬 기분으로 고향 부모님을 찾아왔을 테지만, 여름내 논밭에서 구슬땀을 흘리신 어르신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자식들 앞이라 차마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그 속은 시커멓게 타 들어간다. 오랜만에 해가 떠오른 연휴 첫날 귀향한 가족들을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지난 두 주간 이어진 흐린 날씨 때문에 올 가을 농작물들을 얼마나 수확할 수 있을지 걱정이 떠나질 않아서다.

지금은 지난 여름 무더위를 견디며 자라난 벼들이 이삭을 맺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여물어 갈 시기이다. 헌데 9월에 접어들자 일주일 넘게 비가 그치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하루에 한 두 시간도 볕을 쬐지 못하다 보니 벼에 알곡이 들기 어려웠다. 그동안 광합성을 통해 얻은 영양분으로 줄기와 잎을 키워 냈다면, 이제는 이삭을 맺고 알곡으로 그 내실을 다져야 할 때인데 햇볕을 보기 어렵다 보니 벼가 제대로 여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갑작스레 찾아온 태풍도 한몫을 했다. 서해안을 덮친 태풍 링링은 거센 바람으로 수확을 앞둔 농작물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제 막 이삭이 패기 시작한 만생종 벼들은 백수나 흑수 피해를 입었다. 벼 이삭이 잎을 가르고 나오는 출수가 이루어지고 나면 개화를 하는데, 벼의 내영과 외영이 열리면서 이삭 안에 있던 꽃들이 한 두 시간 안에 수정을 한다. 만약 바람이 너무 강해 수정이 이루어 지지 못하거나 이삭이 상처를 입어 말라버리면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고 쭉정이만 남게 된다. 이른 봄부터 씨앗을 뿌려 모판을 만들고 논에 모내기를 해 여름을 지나온 ‘한 해의 벼농사’가 하필이면 결실을 맺을 시기에 불어온 바람으로 헛일이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밤새 세차게 몰아친 비바람이 지나고 들판에 나가보니 알곡이 어느 정도 여문 벼들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누워 버렸다. 다행히 여물이 든 벼들이라 누운 상태로도 조금 더 익으면 수확은 하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태풍이 지나간 뒤에도 흐린 날이 계속되면서 이삭도열병으로 인한 백수 피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덥고 습한 날이 지속되면서 도열병이 이삭목이나 이삭줄기에 발병했다. 그 탓에 잎에서 광합성을 통해 얻은 영양분들이 이삭으로 옮겨갈 수 없어 이삭 전체가 말라 쭉정이가 되어버렸다. 흐린 날씨가 계속 될 때는 느끼지 못하다가 비바람이 걷히고 해가 떠오르자 도열병 피해를 입은 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도열병은 한 번 발생하면 회복이 어려워 출수 시기가 되면 예방 차원에서 농약을 살포하라고 권장하는데, 유기농 벼논에는 그럴 수 없으니 손을 쓰지 못하고 고스란히 피해를 입게 될 상황이다. 지난 여름에는 푸르러 가는 논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쉼과 여유를 누렸는데, 이제 들녘으로 향하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럼에도 추석이 끝나자마자 가을걷이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잰 걸음은 어느 해처럼 부지런하다.

콤바인을 손보고 창고를 정리하느라 금세 한 주가 지나갔지만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며 차오르던 부푼 마음은 접어두기로 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현상들이 심해지면서 올해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년에는 어떻게 농사를 지어야 할지 슬며시 걱정이 앞서서다.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를 맞추어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것이 농사의 기본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날씨를 예측할 수 없으니 흙과 더불어 살아내는 일이 갈수록 쉽지 않을 것 같다. 이번 주말 서울에서는 ‘유엔기후변화정상회담’에 앞서 기후변화가 아닌 삶을 위협하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해 더 많은 이들의 관심과 행동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진다고 한다. 동참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면서도 주말에 또다시 태풍과 비가 몰아친다는 예보가 있어 일단 링링에 쓰러진 벼들이라도 거두러 논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서둘러 내달리는 마음을 여미다가 문득,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수 년째 유기농사를 지어오던 농부들이 지난 가을에 이어 올 봄에도 스스로 생을 달리하셨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왜일까……. 올해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부디 이번 태풍과 비는 농부들의 우직한 열정을 무릎 꿇리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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