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군 박윤경

[한국농어민신문]


서울서만 살던 25살 막내며느리
농장 일로 땀에 젖은 모습보니 
208번지 초가집서 시작된 부농 꿈
돼지엄마로 산 과정 ‘새록새록’

허허벌판서 경험한 첫 농장 실패
돌 반지까지 팔아 만든 첫 축사
구제역에 밤잠 설치던 숱한 날들… 
한 길 걷다보니 어느새 4000두

수필 흥미로 대학 문창과 늦공부
네 명의 학비 부담 남편 고마워
축산 전공 후 영농후계자된 셋째
남편과 티격태격하는 모습 흐뭇


돼지우리에서 오전 관리를 끝낸 앳된 부부가 걸어 나온다. 온몸이 땀에 젖은 모습이 애잔하면서도 대견하다. 이제 겨우 26살의 막내와 25살의 막내며느리다. 둘은 같은 대학교 축산과에서 만났다. 5년 여간 변함없이 연애하다 부부가 되었다. 서울에서만 살던 며느리가 농촌으로, 그것도 돼지 키우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며느리의 친정 부모님이 큰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 역시 돼지농장에서 직원으로 일하는 남편과 그것도 동리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친정 식구들의 반대가 컸다. 그 힘든 돼지농장 일을 영농후계자가 된 막내가 하고 있다. 가녀린 며느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내가 돼지엄마로 살아오기까지의 과정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초등학교 때부터 담임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적어오라고 하면 난 늘 ‘목장’이라고 써냈다. 닭을 키워 달걀을 팔고, 돼지를 키워 돈을 벌어 곳간에 식량을 채우고 싶었다. 나뭇간엔 땔감도 수북이 쌓아놓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208번지의 초가집에서 시작된 꿈은 부농의 축산인이 되는 것이었다.

한 마을의 친구 오빠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큰 돼지농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농장을 일구겠다는 꿈이 있어서 좋았다. 결혼을 발표하자마자 친정 부모님과 할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홀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장남에다 제사가 많고 무엇보다 가진 것이 너무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는 게 별거냐며 자신만만했다. 남편이 일하고 있는 농장 근처의 안성에서 신혼집을 마련했다. 혼인신고를 하러 면사무소를 갔더니 직원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서류를 들여다보니 남편의 집 208번지와 우리 집 208번지의 주소가 같았다. 나중에 들으니 마을 대부분의 땅이 지주의 땅이라 번지까지도 같았던 것이다.

달콤한 생활 속에 첫아들이 태어났다. 아이가 쑥쑥 클수록 신통하고 예뻤다. 하지만 식구가 늘면서 살림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남편의 월급은 시골집의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과 줄줄이 이어지는 제사 비용까지 열흘도 못가 바닥이 났다. 궁핍한 생활 속에 둘째를 임신했다. 그 와중에 남편은 갑자기 사표를 냈다. 내 농장을 시작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전세로 농장을 구해놨다는 말에 짐을 쌌다.

퇴직금으로 암퇘지를 받아 안성의 ‘구수리’라는 마을 앞 드넓은 허허벌판에 딱 한 채 서 있는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부엌문만 열면 돼지우리가 있는 집이었다. 들녘에서 몰아친 바람은 집을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 구경은 어림도 없었다. 세 살짜리 아들은 우체부가 다녀갈 때마다 오토바이를 뒤따라 뛰어갔다. "아저씨 놀다 가세요"라고 외치며 오토바이를 쫓아가는 아들, 달려봤자 세 살배기가 얼마나 내달리랴. 날이 갈수록 내 가슴속의 울음보엔 차곡차곡 시고도 쓰라린 물이 고여 갔다.

하지만 나는 엄마였다. 철부지 엄마지만 아들 앞에서 눈물만은 보이기 싫었다. 우리 부부에겐 꿈이 있기에 지금부터 실습에 돌입했을 뿐이라며, 아들 손을 이끌고 들판을 향해 “야호” 외쳤다. 아들과 함께 내지른 소리에 새들이 날아오르면 더 크게 웃고, 놀란 개구리들이 조용할 때면 같이 ‘쉿’ 하며 시름을 달랬다. 구들장이 막혀 걸레가 꽁꽁 얼던 집, 집 앞으로 지나가는 농부만 보아도 커피를 들고 달려 나가던 그 외딴집에서 우리는 성공하지 못했다. 너무도 허술한 농장에서 돼지가 잘 클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 이상한 오기가 피어올랐다. 낙심하기보단 패기 같은 것이 불끈 솟구쳤다. 남편과 함께 ‘그래! 다시 시작해보자. 우리에겐 아직 젊음이 있잖아’ 다짐하며 두 번째 이삿짐을 쌌다. 시댁의 시골집 208번지로 들어왔다. 둘째인 딸아이를 낳고 5개월 만이다. 가정의 달에 장롱도 들어가기 힘든 낮은 집에 이삿짐을 구겨 넣다시피 하는 모습을 본 친정 할머니와 엄마가 뒤꼍에서 우셨다. 할머니의 품에서 자고 할머니의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그때부터 겉으로나마 많이 웃기 시작했다. 실없이 마냥 웃을 때도 있었다. 사실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만으로 고마웠다.

남편은 선배가 운영하는 인근 농장에 취직했다. 구수리에서 살 때보다 편안했다. 그 집보다 웃풍도 덜했다. 비록 나무를 때야 하는 구들장이지만 방바닥은 따끈했다. 고향에 정착한 이후 사 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마을 외곽에 농장 터를 마련했다. 아이들 돌 반지까지 팔고 농협에서 빚을 얻어 첫 축사를 짓기 시작했다.

첫눈이 휘날리는 12월의 어느 날, 콘크리트를 받아 첫 동을 짓기까지 동네 형님들과 남편의 친구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기술이 부족한 것 외엔 남편이 손수 용접까지 하며 완공했다. 암퇘지 10마리, 수퇘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바라만 보아도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사료를 줄 때마다 장난치듯 한 줌씩 주기도, 한 바가지의 물을 떠서 통에 담아주면 쭉쭉 물먹는 소리가 얼마나 힘차 보이는지 대견했다.

첫 새끼는 한밤중에 낳기 시작했다. 돼지가 새끼를 낳는 건 처음 보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산고의 고통은 같았다. 긴 진통으로 후~후~내쉬는 한숨 소리에 지켜보는 나도 덩달아 힘이 주어졌다. 어미돼지 옆으로 다가가 배를 문질러주며 힘내라고 하니 ‘국~국~국’ 고개를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힘을 준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첫 새끼를 받았다. 양수를 닦아주려니 자기 새끼 잘못될까 봐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에 어미 마음은 우리네와 똑같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해서 낳은 새끼 열 마리, 갓 난 새끼들이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을 보며 밖으로 나왔다. 가슴 뿌듯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한껏 올렸다. 그렇게 올려본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떠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마치 나를 위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만 같은 보석.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내 걸음을 비추는 영롱한 보석이었다.

새끼 받으며 사료 주고 돼지들 분뇨처리 하는 일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한 동을 짓고 나면 벌어서 또 한 동을 지었다. 숫자가 늘어나면서 화물차도 필요했다. 걀걀 대며 지나가는 화물차만 봐도 부러웠다. 큰맘 먹고 중고차를 마련했다. 운송업자가 전 주인인 차는 12년을 달렸다는 대도 튼실했다. 어느 차량보다 든든하고 믿음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돼지들이 이상하다며 남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큰 탈이 없어 보이는데 남편은 입맛까지 잃었다. 그리고 이틀 뒤부터 새끼들이 죽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새끼들까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나갔다. 설사병이 돈 것이었다. 한 번 들이닥친 질병은 쉬 잡히질 않았다. 그 여파는 사료 값으로 이어지고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짧게 깎았다. 군인 머리보다 조금 더 길었다. 먹는 거부터 사소한 것까지 모두 아꼈다. 축산과를 전공했고 경험도 많은 남편이지만 해가 갈수록 질병이 강해진다며 수의사와 함께 질병 차단에 주력했다. 그리고 매일 질병에 관한 공부와 일지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쳐지기 시작하면서 생리가 매일 비췄다. 몸이 피곤해서 그러려니 하곤 산부인과를 찾았다. 의사는 임신이라고 했다. 얼마 전 꾼 꿈이 떠올랐다. 어느 산속 맑은 계곡물에서 공룡을 닮은 동물이 놀고 있는 것에 깜짝 놀라 깼었다. 희한한 꿈 생각이 떠오르면서 늦둥이를 갖게 된 것이 기뻤다.

배가 불러오자 집과 농장을 오가는 일이 버거웠다. 더구나 불을 때야 하는 부엌에서 일꾼들 수발드는 일이 힘들었다. 어느 날 남편의 후배가 1000만원이 든 통장을 들고 찾아왔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새집이 필요하며 농장 옆으로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후배의 돈 800만원으로 20평의 작은 집을 마련했다. 그을음이 가득하던 부엌에서 새집으로 오니 잠이 오지 않았다.

아늑한 집에서 막내가 태어났다. 아장아장 걸음을 떼면서부터 아빠를 졸졸 따라다녔다. 조막만한 것이 돼지우리를 수시로 들락거렸다. 막내는 그렇게 갓난아기 때부터 돈사에 드나들며 스스럼없이 돼지와 친해졌다. 새집에 새로운 번지가 있었지만 우체부를 비롯한 마을 분들까지 여전히 우리 집은 208번지로 알고 있었다. 그 작은 집에서 세 아이가 튼실하게 자랐고 다복다복 농장을 일궈나갔다. 마침내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제2농장을 마련했다. 기존 농장은 비육사로 꾸미고 제2농장은 분만사로 지었다. 농장 규모가 커지자 직원도 두게 되었다. 농장은 큰 탈 없이 꾸려 나가게 되었다. 아이들 뒷바라지는 주로 어머님이 맡아주셨기에 든든했다.

그 무렵, 없는 시간을 쪼개 수필 창작 교실에서 공부하며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하고 보니 정규 과정의 공부가 더 하고 싶었다. 수험생의 큰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배움의 열기가 솟구치기 시작하면서 향학열을 잠재울 수 없었다. 남편은 나를 데리고 인근에 있는 대학을 찾아 문창과에 입학 시켜줬다. 네 명의 학비를 부담하며 혼자서 농장 일과 들일하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정말 많이 미안했다.

온 식구가 다 바빴다. 모든 일을 책임 진 남편, 공부하는 아이들, 일과 번갈아가며 늦공부를 시작한 나. 그런 속에서도 비육 농장을 하나 더 늘릴 정도로 농장일이 순조로웠다. 제법 농장의 면모를 갖춰가고 돼지들이 아무 탈 없이 잘 커 주는 것 같아 막 자신감이 생길 때 즈음이었다.

하지만 2011년, 복병이 찾아들었다. 구제역! 말로만 들었지 우리나라 누구도 본적이 없는 질병이었다. 나라가 혼돈에 빠질 만큼 도로와 마을 진입로를 통과하는 모든 차량은 소독 과정을 거쳐야 했다. 조바심 속에 자체소독을 한다지만 날짐승과 들짐승은 막을 수가 없었다. 세계적인 질병 앞에 우리농장도 무릎을 꿇었다. 구제역으로 돼지를 매몰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어귀를 에돌며 치솟던 돼지들의 절규, 죄책감에 밤잠을 설치던 숱한 날에 끊임없이 악몽에 시달렸다. 돼지들을 매몰한 후, 직원들 봉급을 주고 나니 손에 쥔 것이 없었다. 그때 아이들의 합심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줘 새로운 각오로 발돋움했다.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두 아이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막내의 학비를 대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막내는 수업시간 내내 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며 가지고 왔다. 엄마가 제일 잘하는 것은 술빵을 만드는 거란다. 인부들 참 거리로 늘 술빵을 쪄냈던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화물차는 있으니 됐고 찜 솥을 구매하라며 막내가 통장을 내미는 순간, 아! 세상 모든 기쁨을 다 얻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정기적금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찐빵 장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정기 적금에 기대 우리는 다시 시작했다.

한 길만 걸어왔는데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누구나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역경을 이겨 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한 길을 걷다 보니 돼지 숫자가 4000두에 이르렀다. 대부분 부모는 자기의 직업만큼은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아들 중 누군가는 후계자가 되길 기대했다. 그런데 수능을 치른 막내가 갑자기 축산과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여덟 살 터울의 제 형은 야단이 났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기계과와 자동차과에 합격해놓고도 축산과를 선택하려는 막내를 이해할 수가 없다며 화를 냈다. 앞으로 축산업이 불투명하다며 막내의 뜻을 꺾으려고 어르고 달랬다. 막내를 업어주고 형으로서 아는 것을 아우에게 가르치던 큰아이다. 때론 매까지 들 만큼 역할을 한 큰아이 앞에서 우리 부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제 형의 큰 반대를 뿌리치고 막내는 축산과에 입학했다. 부모 관점에서 내심 든든했다. 우리가 젊었을 때 꿈꾸었던 활력이 다시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민간신앙에서 돼지에 관한 것들은 복중의 복이다. 사람들은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산다. 고사를 지낼 때도 돼지머리에 절을 한다. 그만큼 복을 주는 돼지, 축산과를 진학하는 막내의 학비를 내면서 복중의 복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내부 시설을 보완하고 돈분장을 고치자는 등등 미래형 설비를 갖춘 돼지농장을 설계해 나갔다. 막내가 이 길에 들지 않았다면 더는 투자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내가 이 길에 들지 않았는가. 투자도 아깝지 않고 평생 닦은 기술, 긴 세월의 경험 등등의 자산을 막내에게 물려줄 수 있어서 우리는 기뻤다. 그 즈음 비육농장 한 곳을 더 늘릴 만큼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막내는 대학에서 참참이 장학생으로 선발돼 해외로 농장견학을 다녀왔다. 국내의 굵직한 농장에서도 견학하며 견문을 넓혀갔다. 그러던 차에 막내가 마지막 해외연수를 떠났다. 그런데 변고가 생겼다. 가자마자 뒤로 넘어져 허리를 다쳤다.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이 고통을 겪는 나날이 이어졌다. 아파죽겠다고 소리치는 녀석이 여자 친구만 옆에 있으면 앓은 소리는커녕 마냥 싱글벙글한다. 우리로선 마음이 놓였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고 했던가. 둘의 사이는 더 끈끈했다.

돼지농장을 잘 경영해 보겠다는 꿈을 가진 막내는 마침내 영농후계자로 선정되었다. 아직 어린 부부지만 막내 내외는 새벽부터 농장 일에 앞장선다. 며느리는 농장에서 돼지들과 함께 있으면 활력이 넘치고 기분이 좋다니 천생 나를 이은 돼지엄마다. 남편과 나는 최고의 양돈농장이라는 꿈을 향해 긴 세월 걸어왔다. 비록 오밀조밀하게 농장을 일궈왔지만, 경험과 기술만큼은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한다. 몇 해 전부터는 미래형 농장을 가꾸기 위해 환경 정화에 필요한 설비를 보완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시설하고는 맞지 않아 현실적으로 어려움도 있다. 독일과 네덜란드 등의 선진 축산업을 쫓아가려면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만만하지가 않다.

막내가 본격적으로 농장에서 일하면서 가끔 두 부자가 티격태격했다. 앞을 생각해 과감히 투자하자는 신세대와 돌다리도 두들겨야 한다는 구세대 간의 의견이 부딪친다. 해외연수까지 다녀와 신식 공부를 한 막내와 이제까지의 경험이 쌓인 아버지와의 공방이 치열할 때면 나와 막내며느리는 그저 웃기만 한다. 둘 다 고집이 세고 목표를 정하면 밀고 나가는 성격이니 끼어들 수가 없다.

부자지간의 그 충돌이 나는 보기 좋다. 우리는 비빌 언덕도 없이 어렵게 일궈 여기까지 왔다. 아들내외가 지금처럼만 열심히 돼지농장을 이끌어 간다면 이제껏 터득한 경험과 기술을 몽땅 쏟아 부어 줄 것이다. 부모가 꿈을 향해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 왔듯, 막내는 이웃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줄이며 또 다른 선진 축산의 기술을 익혀 힘찬 날갯짓을 펼치길 바란다. 우리도 뒤에서 힘닿는 데까지 팍팍 밀어줄 것이다. “막내야! 며늘아! 열심히, 힘껏 날개를 펴고 신명나게 날아보렴. 어미·아비가 무한 응원을 해 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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