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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정 혁신과 지방분권, 시간이 걸려도 가야 할 길

[한국농어민신문]

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농정시스템, 관료제 맹목·비효율 심각
수술 준하는 변형 감행·체질 강화 필요
지방 자율·창의를 믿어보는 수밖에


농정 시스템의 말단에서 ‘정책 연구’라는 명목으로 밥벌이하는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자 성찰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글을 시작한다. 단지, 남 탓 하려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공룡처럼 비대한 몸집이 되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뒤뚱거릴 뿐인 현재 농정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문제점의 상세 목록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다.

수십 가지 문제점을 댈 수 있지만, 그중 하나를 말하라면 농정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관료제의 맹목과 비효율을 들고 싶다.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이 거대해지면 의사결정이나 동작은 굼뜨게 되고, 새로운 실험은 귀찮아지고, 존재 이유는 망각된다. 시스템에 복무하는 구성원들은 ‘현상 유지가 자신의 하는 일의 최상위 목표’라는 깨달음 아닌 깨달음을 온몸에 기입(記入)하게 된다. 농업·농촌의 현실 문제를 심층적으로 파악하고 방책을 고민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제기되는 민원에 적당히 대응하거나 감사 때에 지적받을 수 있는 꼬투리를 제거하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간혹, 유능한 이가 있어도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수장(首長)의 호오(好惡)에나 민감하게 반응할 뿐이다. 정책을 뒷받침할 공의(公儀) 따위는 살펴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권한을 최대한 이용해서 윗분의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 그렇다고 해서 관료제 형식의 농정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며 개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도 없는 일이다.

개혁 불가 상태이므로, 즉 대마불사(大馬不死)이므로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고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으리라. 본디 관료제는 비인간적일 망정 과업만큼은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근현대 사회의 핵심 시스템이었다. 점원이 아무리 바뀌어도 언제나 똑같은 맛과 모양의 햄버거를 신속하게 만들어 내는 맥도날드 같은 패스트푸드 기업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농정 시스템은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관료제는 관료제이되, 이상하리만치 맹목적이고 비효율적인 관료제에 농정이 붙들려 있다.

그 결과 시스템의 중앙과 말단을 가리지 않고 도처에서 씁쓸하고 허탈한 일들이 빈발한다. 중앙정부 부처의 고위 관료 한 명이 별 생각 없이 내뱉은 지시사항 때문에 수백억 원 짜리 재정사업의 내용과 방향이 순식간에 바뀌는 위험한 일, 일년에 6000만원의 정책사업 보조금을 받아 이런저런 활동을 수행한 민간단체가 보조금 정산 때에 2000쪽 분량의 사업 실행 결과 보고서를 군청에 제출해야 하는 황당한 일, 지역의 농업 발전이나 주민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5년 단위 중장기 계획을 지방자치단체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용역을 발주해 수립하지만 대부분은 책상 서랍 안에서 잠자는 페이퍼 플랜이 되고 마는 의존과 무의욕, 친환경농업을 하는 농민이라면 잘 숙성된 퇴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보조금 사업에 힘입어 전국에 공급되는 엄청난 양의 유기질 비료의 부숙도에 문제가 있어도 그 공급 체계를 크게 개선할 방도를 못 찾는 무기력, 수십 억원 보조금으로 지은 건물은 놀고 있는데 예산 때문에 건물을 또 짓는 낭비, 한쪽에서는 청년에게 스마트팜 유리온실을 지으라며 20억원이 넘는 돈을 담보 없이 융자해 주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청년들이  비닐하우스 두어 동 지을 1000평 남짓 농지를 살 자금도 없고 임차 농지도 구하지 못해 ‘농업인 되기’가 난망(難望)인 부조리 등등.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농정 시스템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한두 가지 정책이나 제도를 제안해서 농정 시스템을 혁신하겠다는 건, 길 잃은 공룡이 제 갈 길 잘 가도록 그 꼬리를 붙들고 ‘왼쪽, 오른쪽’을 외치면서 흔들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공룡은 소가 아니다. 혹자는 공룡의 뇌를 수술해서 제대로 생각하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수술용 칼도 없고 의학 지식도 부족한 상태에서 떠드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방책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이 걸려도, 농정 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간단한 소품(小品)은 고치지 않고 새것을 사면 되는데, 행정과 재정과 정치가 결합된 농정 시스템은 다른 것으로 갈아 치우거나 완전히 새로 만들 수 없다. 힘들어도 고쳐 써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농정 시스템 혁신의 한 방책으로 ‘농정의 지방분권화’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다. 농정의 지방분권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 정부의 정책 기조가 지방분권이어서 그렇다는 말은 정답이 아니다. 지방분권을 중요 정책 기조로 천명하게 된 그 이유를 살펴야 하리라. 지방분권이라는 처방약의 효능을 검증할 시기는 아니지만, 오래 전부터 적지 않은 논자들이 ‘민관 협치’니 ‘상향식 농정’이니 하는 주장을 통해 지방분권을 강조해왔다. 적어도, 산처럼 큰 몸집을 작은 두뇌에만 의지해 조종하는 방식으로는 효율도, 참신함도, 다양성도, 활력도, 실험도, 혁신도 기대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만큼은 타당하다. 이젠 지방의 자율이나 창의를 믿어보는 길밖에 남지 않은 듯하다. 변화는 언제나 변방에서 시작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물론, 지방농정 역시 현재 상태로는 거대한 시스템의 말단에 불과할 뿐이다. 농촌 지방자치단체 수준으로 내려가도 관료제 구조는 규모만 축소되었을 뿐 그대로 온존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지방분권이 약효를 발휘하려면 외과 혹은 내과 수술에 준하는 변형을 감행하고 오랜 기간의 단련을 통해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 돈줄을 중앙에서 지방으로 넘기는 재정분권이 수술이라면, 민-민 그리고 민-관 소통과 협치를 바탕으로 농촌 지역마다 걸맞은 발상과 계획으로 농정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자치분권은 단련이다. 체력 단련에는 긴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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