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위원, 농정전문기자

[한국농어민신문 이상길 농정전문기자]

한국 경제, 농민과 농촌 희생으로 성립
성장과 개발 논리로 농촌 수탈 악순환
농정개혁은 성장·토건주의 청산이 핵심
농민이 빼앗긴 몫, 농민에게 돌려줘야


“도시는 그 문명을 영위할 최소한의 조건, 곧 생존조건을 모두 농촌에 빚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도 시골에서 먼 길을 돌고 돌아 가정까지 닿습니다. 농촌이 만약 도시와 같다면 지금의 미세먼지는 수십 배 달하는 위험으로 다가와 도시문명조차 파괴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단순히 물과 공기뿐이겠습니까? 생명을 영위할 먹을거리 일체도 결국 농촌이 아니고는 어디에서도 조달할 방법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농촌이 살만한 곳이 된다는 건, 그래서 도시가 그나마 쾌적한 삶의 조건을 유지할 수 있는 필수 조건입니다. 농촌이 사라지면 도시도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 부산교구 주보 ‘환경과 생명’ 칼럼, -도시를 위한 농촌의 선택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농촌은 인류와 도시문명을 지탱하는 존재다. 그러나 농민은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도시는 농촌을 끊임없이 수탈하고, 농촌으로 끝없이 확장한다. 도농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

자본주의 산업화는 농민과 농촌의 희생을 수반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이전 봉건사회의 자영농민으로부터 생산수단인 토지를 수탈, 그 노동력을 자본을 위한 임금노동으로, 생산수단을 자본으로 축적하면서 성립됐다. 농민들을 농지에서 쫓아내는 것을 ‘인클로저’라고 했다. 이 과정이 ‘자본의 원시적 축적’ 또는 ‘본원적 축적’이다. 농촌과 식민지 수탈을 통해 공업과 도시가 발달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외부 식민지가 없는 대신 농민의 희생 위에서 재벌에 의한 수출 공업화 중심의 경제개발을 시도했다. ‘조국 근대화’ ‘새마을운동’을 내건 박정희 시대를 우리는 ‘개발독재’라고도 부른다. 시대가 바뀌어 ‘개발독재’는 사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잘못된 지배담론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잘 살아보세’로 표현되는 ‘경제성장 지상주의(생산주의)’ ‘개발주의(토건주의)’다. 경제성장과 개발을 맹신하는 패러다임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우 ‘747 공약’ ‘4대강 사업’으로 성장 지상주의, 토건국가의 진수를 보여줬다.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세계 금융위기도 겪은 뒤 경제성장, 무한 경쟁으로는 1%를 위한 양극화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종언’까지 얘기됐어도,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 성장주의 아래서 재벌은 비대해지고, 토건업과 정치 행정의 부패 네트워크 아래 오늘도 이 땅 곳곳에서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이전 정부의 토건주의를 비판하던 문재인 정부도 경제성장론의 압박이 거듭되자 균형발전을 내세워 고속도로, 철도, 국제공항, 항만 등 대형 토건사업으로 회귀하는 모양새다.

자본과 도시를 위해 희생된 농촌(지방)은 이제 소멸 위기에 놓였다.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야 할 농지는 성장과 개발이란 논리로 자본과 투기세력에 넘어가 헌법상 경자유전 원칙마저 형해화됐다. 농지에는 아파트와 공장, 발전소와 댐, 송전탑에 이어 태양광 패널, 스마트팜 유리온실이 들어선다. 농민이 생산하는 농산물에는 낮은 대가만 지불하고, 외부자본이 헐값 또는 공짜로 농촌 자원을 수탈하는 것도 모자라 유해 폐기물까지 버린다.

농촌 문제를 넘어 지방소멸의 문제가 악화되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각종 지역 활성화, 균형발전을 정책의 중요 기조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기존의 성장주의, 토건주의 방식을 답습하는 방향이란 게 문제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지역개발, 지역재생,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크고 작은 토건사업을 벌이고 시설을 짓는다. 농촌개발사업이 농민과 지역주민을 배제하고 정부와 농어촌공사 맘대로 한다고 비판 받자, 이제는 주민 공모사업이란 말로 또다시 건물과 시설을 건설하는데 예산을 아끼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기존의 생산주의 농정을 청산하고 지속가능한 농업, 농업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농정으로 농정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농정개혁이 성공하려면, 그동안 생산주의 농정의 대명사인 농촌진흥청, 토건농정의 중심인 한국농어촌공사의 조직과 예산을 근본적으로 함께 검토해야 한다. 농민을 위한 정부 사업을 수익 창출의 시장으로 삼는, 수많은 농관련 업자들에게 흘러가는 예산도 촘촘히 타당성을 들여다봐야 한다.  생산, 토건주의 생태계를 그대로 두고는, 농정개혁의 성공은 전망할 수 없다.

그동안 수탈당하며 농촌을 지켜온 농민들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지불돼야 한다. 농민에게 가야 할 예산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을 막고 이를 농민에게 돌려줘야 한다. 몇 푼 안 되는 기존 농민 몫의 직불금을 다른 이름으로 바꿀 것이 아니라 농업재정 전체를 개혁하고 농민 몫을 대폭 늘려야만 농정개혁이 가능하다. 농민들은 지금까지 누려온 것이 아니라 빼앗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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