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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농민항쟁’ 첫 기념식 열려

[한국농어민신문 구자룡 기자]

▲ 진주농민항쟁 제157주년 기념식이 지난 14일 진주시 구곡면 창촌리에서 열렸다.

동학농민전쟁 등 선구적 역할
2012년 창촌마을에 기념탑도


수탈과 착취에 맞서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섰던 진주농민항쟁을 기념하며 항쟁정신 계승과 농업·농촌 수호를 위한 결의를 다지는 행사가 진주농민들에 의해 올해부터 열리게 됐다.

지난 14일 진주시 수곡면 창촌리 소재 진주농민항쟁기념광장에서 진주시농민회·진주시여성농민회 주최, 진주시농민단체협의회 후원으로 ‘진주농민항쟁 제157주년 기념식’이 진행됐다.

김준형 경상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교수의 ‘1862년 진주농민항쟁의 개요와 의의’에 따르면 조선시대 말기 조세제도가 문란해지면서 백성들의 고통이 커졌다.

그중에서도 불만 폭발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도결’의 시행이었다. 이는 춘궁기에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실시되던 ‘환곡’의 운영과정에서 관리들의 비리로 축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지방 관리들이 각 고을에서 실시하던 부세방식이었다. 더구나 진주 우병영에서는 ‘도결’ 이외에 ‘통환’이란 이름으로 주민에게 새로운 부담을 지게 했다. 주민들은 이를 없애줄 것을 감영 등에 여러 차례 청원했지만,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시를 철거하고 집단시위에 나섰다.

진주농민항쟁은 조선철종 13년인 1862년 음력 2월 14일(양력 3월 14일) 진주의 서북쪽 끝자락 덕산장의 봉기로 막이 올랐다. 농민군은 덕천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세력을 규합하고 19일 관아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진주목사와 우병사가 ‘도결’과 ‘통환’을 취소한다는 증서를 써줬지만, 농민군은 읍내 장터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일부 아전들이 타살되기도 했다. 다음날 농민군은 진주목사와 우병사를 풀어주고 다시 동남방으로 행진하며 농민들을 못살게 굴었던 토호들을 공격했다. 옥천사에서 하루 기숙한 이후 2월 23일 해산함으로써 항쟁은 일단락됐다.

진주농민항쟁의 핵심세력은 농민, 그중에서도 초군이었다. 이 항쟁을 이끌었던 지도자로는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이 있었다. 이 저항운동은 단지 수탈에 대한 불만에 의해 폭발됐 것만은 아니었다. 그 밑바닥에는 끊임없이 기존의 사회체제를 바꾸려 여러 방면에서 전개된 민중운동의 흐름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진주농민항쟁을 계기로 농민항쟁은 삼남지방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됐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일제시기 농민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최근까지도 우리나라 농민운동사에 선구적 역할을 수행해온 진주농민들은 이 항쟁의 정신을 되새기고자 2012년 수곡면 창촌마을에 진주농민항쟁기념탑을 세우고 광장을 조성했다.

이 탑이 세워진 곳은 항쟁 당시 진주에서 가장 번성한 장시 중 하나였던 수곡장이 서던 곳이다. 항쟁이 본격화되기 전 대중의 힘을 동원하기 위해 ‘도회’라는 대중집회가 열린 곳이 바로 수곡장터였다. 항쟁의 방향을 결정하고 여론을 확산시켜나간 중요한 장소다.

박갑상 진주시농민회장은 “기념탑이 세워지긴 했으나 제대로 된 기념식 없이 매년 지내왔다”면서 “수탈과 착취에 맞서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 서 나간 진주농민항쟁 기념식을 올해부터 진행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진주농민항쟁의 저항과 투쟁은 오늘의 우리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사람답게 주인답게 살기 위해 시대의 운명을 개척해온 진주농민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함께 나누어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 고귀한 얼을 되새겨나가자”라고 피력했다.

진주=구자룡 기자 kucr@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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