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나 청년농부·전남 구례

[한국농어민신문]

“올해도 그 밭 또 빌릴거야?” 마을 끝 집에 사는 언니가 해 바뀐 뒤 처음 만나자 내게 묻는다. 무경운, 무농약으로 밭을 일구는 나를 마을에서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이웃이다. “네~ 어르신한테 이미 임대료도 15만원 보내드렸는걸요.” 내 대답에 뭔가 답답한 표정이다. 약간 뜸을 들이더니, “농사를 지었으면 돈이 생겨야지. 그렇게 임대료니 뭐니 돈만 쓰고 힘은 힘대로 들어서 어째.” 벌써 여러 번 들은 말이다.

나는 작년 이맘때 구례의 한 작은 마을로 이사를 왔다. 이사 와서 어린 감나무만 심겨진 채 몇 년째 버려둔 땅, 200평 정도를 빌렸다. 지난해 봄부터 늦가을까지 내가 밭을 오르락내리락 거릴 때마다 동네 어른들은 꼭 한마디씩 하셨다. “아니 그 밭에 뭐가 있다고 그리 매일 다녀싸?” 감나무 사이에 십여 가지 종류의 채소가 심겨져 있고, 제초도 비닐 멀칭도 하지 않은 내 밭이 어른들 눈에는 아무래도 밭 같지 않은 듯 했다. 내가 농사짓는 모습은 뭔가 답답하고, 내 밭은 밭 같지 않은 가보다. 농부가 되기에 난 뭐가 부족한 걸까?

나는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는 군청에서 계약직으로 일 했다. 구례로 이사 올 때, 집과 밭을 임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리도 함께 찾았다. 집, 밭 그리고 일. 시골로 이사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농촌에 살더라도 당장은 농사만으로 먹고 사는 귀농인이 될 수 없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와서 보니 농사를 업으로 삼는 분들은 내 상상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농업 지식과 노동 강도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영농과 투자의 규모는 내가 따라갈 수 없어 보였다. 농사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더욱 먼 꿈처럼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농사를 지어보고 싶었다. 내 먹거리 정도만 해결하는 텃밭 농사라도 연습을 해 봐야 내가 원하는 농사가 어떤 모습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연습의 시간 동안 나는 살아야했다. 생활비를 만들기 위한 일자리는 필수였다. 농사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는 나는 농부가 맞을까?

농촌에서 한 해를 보낸 뒤, 요즘 스스로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나는 농부일까?’이다. 소꿉장난 같은 농사를 지으며 애를 쓰는 것 같긴 한데 수익은 못 만드는 나는 주변 농사꾼들 기준에선 농부가 아니다. 1년 중 7개월을 군청 계약직으로 하루 8시간 일했고, 가끔은 이전 서울 직장에서 주는 재택 일도 했다. 농사와 관련 없는 일들로 생활비의 대부분을 버는 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란 뜻의 직업 분류에 의해서도 농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농부이고 싶다. 농촌으로 이사를 왔으니 전업농이 되어 농업 기술을 갖추고 수익을 얻어야만 농부일까? 1000m² 이상의 땅을 소유하여 농업경영체를 등록해야 농부가 되는 것일까?

어쩌다 직업을 표시하라고 뜨는 인터넷 회원가입 절차에 ‘농부’라는 직업군이 없으면 속상해 하는 나를 본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파문 뉴스에 ‘역시 너는 농사나 지어라’라고 쓴 댓글을 보면서 “농사는 아무나 짓는 줄 아나!”라며 분노하는 나를 본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자신 내부에서 일관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른 사람과의 어떤 본질적인 특성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정체성이라고 정의했다. 객관적으로는 아무도 농부라 불러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어느새 농부라는 정체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2018년을 마무리 하며 나는 스스로를 농부라 부르기로 했다.

농부로서 새해를 맞이하며, 세상에 더 많은 다양한 농부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전문 농부는 물론이고, 농촌에 살며 경력이나 특기를 이용해 여러 가지 일을 해 돈을 벌고, 텃밭 농사를 짓는 사람도 농부. 농촌과 관련된 유통, 마케팅, 서비스 일을 하며 더 나은 농촌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도 농부. 도시에 살며 주중에 출근하는 직장이 있지만, 주말에는 분양받은 주말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농부. 흙을 만지고, 생태계와 생명체를 소중히 여기며, 내 식탁에 올라오는 먹거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 모두가 농부였으면 좋겠다.

더 다양한 모습의 농부들이 늘어나면, 조금 더 나은 세상이 될 것 같다. 마치 농부가 된 후, 내가 한 뼘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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