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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황금돼지해가 밝았다] 한국인과 돼지

[한국농어민신문]

이명아 작가

세계 도처에서 돼지는, 불결하고 불편한 존재다. 먹는 것은 고사하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부정 탄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종교적인 이유에서다. 이슬람교도 삶의 방식을 규정짓는 율법인 코란에서는 음식을 먹는 것도 경배의 한 과정으로 여긴다. 식사 전후에 입과 손을 씻는 것은 물론이다. 알라의 이름으로 허용되는 음식은 할랄(Halal), 그렇지 않은 음식은 하람(Haram)으로 나눠서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규정짓는다. 식품에 일일이 인증마크를 붙여서 판매할 정도로 까다로운데 먹이를 입으로 잡는 네발 달린 짐승, 그중에서도 모든 돼지는 결코 먹어서는 안 될 불결한 존재다.

유태교도 마찬가지라서 새김질을 하는 소나 양은 오케이. 불결한 돼지는 절대 금지다. 그럼 소시지나 베이컨도 먹지 않느냐고? 물론이다. 입에도 대지 않는다. 유대교의 율법에 따른 식사법을 뜻하는 코서(Kosher) 인증마크를 붙인 소시지는 많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쇠고기, 오리고기를 사용했다는 표시를 반드시 해놓는다. 힌두교도는 소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이라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돼지고기 역시 피한다. 불결하니까. 힌두교도중에 채식주의자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지방질이 많은 돼지고기는 부패 속도가 몹시 빠르다. 기온은 높고, 식품 보관법이 발달하지 않았던 지역에서 돼지고기를 철저하게 금하는 이유이다. 말로 해서는 잘 듣지 않으니 율법으로 묶어버리는 거다.

한국인에게 돼지는, 참 만만하고 편하다. 흉허물 없이 가까운 이웃 같은 존재다. 예로부터 애경사를 당하면 우선은 돼지부터 잡고 보는 것이 순서다. 잔치를 집에서 치르는 것이 일상적이었던 시절에는 마당에 가마솥 걸어 돼지고기를 삶고 비계를 솥뚜껑에 문질러가며 빈대떡이며 이런저런 전을 부쳤다. 혼인이나 회갑연처럼 축하할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걸핏하면 동티가 났네, 부정 탔네 말 많기 쉬운 초상집에서도 돼지고기는 환영받는 식재료였다. 지금도 그렇다. 육개장 맛이 아무리 좋은들, 돼지 머리고기 없는 장례식장은 상상만으로도 허전하고 아쉽다.

특정 지역에서만 유독 즐기는 음식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잔칫집 핑계를 댄다. 목포 사람들이 홍어 맛을 논할 때, 울진 사람들이 가오리찜 자랑을 할 때, 포항 사람들이 오돌오돌 씹히는 개복치에 입맛을 다실 때, 사족처럼 붙는 말은 “이 동네서 애경사에 이 음식 빠지면...”이다. 물론, 삶은 돼지고기 한 접시는 기본으로 두고 하는 얘기다. 제아무리 맛있는 홍어무침이 상에 올랐어도, 제육 한 점 없다면 무슨 소용일까.

지존이신 임금도 종종 돼지고기를 드셨다. 돼지고기를 넓게 펴서 저민 후 꽂이에 꿰어 간장 양념과 참기름을 바른 다음 숯불에 구운 ‘연저적’은 수라상에 오르는 음식이었다.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행궁으로 행차를 하며 드신 음식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도 이 ‘연저적’이 등장한다. 돼지고기를 삶아서 양념한 후 해삼, 전복 볶은 것과 고명을 얹어 쪄낸 돈육찜, 돼지가리찜(돼지갈비찜), 돼지 족구이, 돼지 족을 삶아 썰어 잡채처럼 무친 족채도 모두 궁중 수라상에 올랐다.

그렇지만 역시 돼지고기는 서민에게 만만한 음식. 삼겹살이 그렇고, 돼지갈비가 그렇다. 최근에는 한국인의 지나친 삼겹살 사랑을 경계하며 다른 부위에도 눈길을 주라는 캠페인이 종종 등장할 정도다. 1973년에 출간된 김화진의 『한국의 풍토와 인물』이라는 책을 보면 1900년대 초반 서울 장안의 목로주점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뒷골목이나 각 동리의 으슥한 곳에 사방이 터진 온돌에 큰 쟁개비(鍋)를 걸고서 언제든지 물을 끓게 한 다음 앞에는 주인이 앉아 있고 뒤에 목판을 비스듬히 세워 놓는다. 마른안주로 우포, 어포를 팔고 진안주로 너비아니, 날돼지고기, 삶은 돼지고기, 편육, 빈대떡, 떡산적, 구운 생선, 회 등을 널어놓아 파는 곳이다. 큰 화덕을 세우고 숯불을 이글이글하게 피운 위에 석쇠를 걸어 놓고 중노미(안주 굽는 남자)가 큰 젓가락을 들고 대기한다. 술 한 잔에 무슨 안주든지 하나씩 주고 술값만 받았다. 여기서도 가장 만만한 안주는 역시 돼지고기였던 모양이다. 날돼지고기를 숯불에 구워 술 한 잔에 곁들여 내는 모습이 포장마차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삶은 돼지고기 몇 점 얹은 접시가 요즘 유행하는 스페인 식 ‘타파스’를 떠올리게도 한다.

천편일률적인 삼겹살 밥상이나 술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옛 기록이 좋은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방 없는 앞다리를 얇게 저며 구운 연저적을 다이어트 식단으로, 족채나 돈육찜을 전통주에 곁들이는 안주로 활용하는 것이다. 최근 외식업계의 가장 핫(!)한 테마는 ‘경성’이다. 익선동 카페거리에 즐비한 1920년~1940년대 테마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곳들이다. 1900년대 목로주점의 ‘돼지고기 안주와 술 한잔’ 테마도 재미있어 보인다. ‘소확행’이 대세인 요즘, 꽤 매력적인 사업 아이템이 되지 않을는지.

12간지 동물 중에 ‘황금’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동물은 없다. 유독 돼지에게만 ‘황금돼지’라는 수식어가 익숙하다. 상서롭지는 않지만, 사람을 이롭게 하는 가축. ‘福’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돼지의 해다. 작아도 좋으니 확실한 ‘복’을 빌어볼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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