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전두환 정권은 제5공화국 헌법 제122조에서 ‘농지의 소작제도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금지된다. 다만 농업 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 이용을 위한 임대차 및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라고 규정하고 임대차를 허용했다.


농업계는 1978년 이후 개방농정으로의 농정전환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농민들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 무너지고 있었다. 농수산부와 경제기획원 간의 정책갈등도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농정갈등의 와중에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했다.

박 대통령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18년간 산업화의 성공적 추진으로 가난한 농경국가를 부국강병의 근대적 도시 산업국가로 탈바꿈시키며 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데 헌신했다.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농어민을 비롯한 국민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으로 조국 근대화의 희망도 심었다. 그러나 정경유착의 관치경제체제를 구축하고 국민의 자유와 민주를 억압하고, 언론과 인권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등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국민을 절망에 빠지게 했다. 박 대통령은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재정치의 독배(毒杯)를 들었고 ‘밥으로만 살 수 없다’라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자유의지를 짓밟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이를 위하여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할 의무를 진다...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의...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제3공화국 헌법 1조, 8조와 32조. 1962년 개정)라는 인간 존엄과 인권 존중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라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고 스스로 헌법 위에 존재하는 제왕적 대통령이 된 것이다.

유신 독재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생겨난 정치적 공백 상태에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 중심의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신군부는 권력을 장악한 후 1980년 5.17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정지시키고 정당을 해산하는 등 사실상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5월 31일 전두환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여 헌법기관들을 무력화시켰으며, 8월 27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이 대통령에 선출되고 9월 1일 취임하였다. 신군부는 헌법개정을 추진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로 새 헌법을 확정하고 10월 28일에는 국보위를 폐지하고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회의 기능을 대행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다. 다음 해인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은 체육관에서 임기 7년의 대통령에 다시 선출되어 3월 3일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이 탄생하였다.

1980년 5월 국보위가 출범하면서 개방농정의 중심인 김재익 경제기획원 국장이 ‘경제과학분과위원장’으로 발탁된 후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 되어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는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경제정책을 통할하게 되었고 그가 주창하는 개방농정은 전두환 정권의 농정기조가 되었다. 국보위 농수산분과위원장에는 김주호 농수산부 식산차관보에 이어 박종문 농산차관보가 맡았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성배영 수석연구원이 분과위원으로 국보위에 참여했다. 박 위원장은 농업계 인사로는 유일하게 국보위를 거쳐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이 된 후 1982년에 농수산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1980~85년간 전두환 정권의 농정실세로 활동했다.

1980년 10월 27일 개정 공포된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건국을 위한 헌법제정 이후 32년간 유지돼온 우리나라 농지 제도의 근간을 수정하는 농지 임대차제도를 허용했다는 점에서 농정사적 의미가 있다. 1948년 건국헌법은 제86조에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라고 규정했다. 이승만 정부는 헌법이 정한 건국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1949년 농지개혁법을 제정 공포하고 농지 소유는 직접 경작하는 농민으로 한정하고 ‘소작, 임대차, 위탁경영 등’을 금지하여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확립했다. 박정희 정권은 경자유전 원칙을 더욱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1963년 제3공화국 헌법 제113조에 ‘농지의 소작제도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금지된다’라고 명문화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제5공화국 헌법 제122조에서 ‘농지의 소작제도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금지된다. 다만 농업 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 이용을 위한 임대차 및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라고 규정하고 임대차를 허용했다. 이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이농(離農)과 함께 임차농지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나타난 농가 간 임대차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농업계의 논쟁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1974~75년간 농지임대차실태조사를 통해 임대차를 현대적 소작제도로 규정하고 임대차 금지를 주장했다. 반면 연구원의 오호성 수석연구원은 1978~79년간 수행한 농지 제도 개선방안연구를 통해 현대의 임대차는 지주에 의한 고율 소작료 징수나 신분적 종속관계가 아니라며 급격한 탈농이촌(脫農離村) 등 농촌경제사회 환경변화에 대응하여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농가 간의 농지임대차는 제한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지임대차 허용은 헌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 연구원의 김동희 부원장과 오 수석 등의 노력으로 헌법에 반영되었다. 이후 연구원은 1987년 농지임대차관리법 제정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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