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이상길 논설위원·농정전문기자]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로 시작하는 ‘농민가’는 농민들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로부터 사랑받아온 노래다. 민중의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면, 농민의례에선 ‘농민가’를 부른다. 농민대회, 대학생 농활, 농민행사나 회의에서 꼭 제창하는, 농민의 노래다. 농민가는 고추 제값 받기 운동으로부터 농협민주화, 수입개방, FTA 등 70년대부터 농민들의 투쟁현장을 함께 해왔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하던 80년대 대학가에서는 농민가와 함께 ‘해방 춤’이 있었다. 해방 춤이란 4박자 춤으로, 농민가 노래에 맞춰 박수를 치면서, 두 사람이 옆으로 부딪친 다음, 팔을 걸고 한 바퀴 도는 춤이다. 당시 학생들은 농민가를 부르며, 해방 춤을 추고, 교문 앞으로 나아가 스크럼을 짜고 독재정권과 맞섰다. 농민가는 단순히 노래가 아니라 민초들이 힘들 때 힘이 나게 하고, 흐트러진 대오를 하나로 모으는 그런 존재였다.

농민가는 오랫동안 ‘작자미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농민운동가 김준기 선생(전 한국4H 본부 회장)과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작사자로 오르내리면서 궁금증을 낳았다. 여러 언론을 통해 김준기 선생이 노래를 보급한 이로 알려졌고, 나도 2009년 김준기 선생을 인터뷰 하면서 농민가의 유래를 확인한 바 있다. 김준기 선생은 당시 “가사는 나와 동기인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과 후배인 이용화(언론인) 등 농사단 멤버들의 의견을 모아 만든 공동창작이고, 곡은 구전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소 모호하던 농민가의 작사자는 김성훈 전 장관이 자신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궁금증이 해소된다. 이 노래는 원래 1961년 수원의 서울대 농대 학생서클이던 ‘농사단’의 단가였다. 김 전 장관은 올해 팔순을 맞아 펴낸 ‘농은 생명이고 밥이 민주주의다’라는 책의 서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 때 우리가 지어 부르던 농사단가가 훗날 농민가로 제목을 달리하여 모든 농대생, 나아가 전국의 시위 때마다, 특히 1980년대 반정부 시위 때 단골 행진가로 불리었다. 실은 내가 작사하였고 이용화가 소련 노래의 곡조를 붙인 노래였다. 그러나 작사자 미상으로 1961년에서 2005년까지 계속 널리 불리었다. 내가 작사자라는 사실이 들통 나면 경을 쳤을 그간의 우리나라 정치상황(박정희 18년, 전두환 노태우 13년)을 생각해보라. 노무현 정부 들어 김근태 복지부 장관이 주관하는 한 모임에서 내가 원 작사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모임이란 상지대학교 총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2005년 8월 강원도 화천 임낙경 목사의 출판기념잔치에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고 김근태 선생과 초청받아 갔던 일을 말한다. 그 때 받은 책에 농민가가 수록되어 있었는데, ‘작자 미상, 작곡 미상’이라는 설명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마침 그 자리에는 옛 농사단 단원이었던 정진석 동문이 동석해 있어, 상의 끝에 용기를 내어 축사를 하는 도중에 이 노래의 원 작사가가 자신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고 한다.

김준기 선생은 “김 전장관이 원래 글을 잘 써서 가사 초안을 잡았고, 단원들이 모여서 그걸 확정했다”면서 “원래 농사단가인데, 농사단가라고 하면 언더서클이 드러나니까 ‘농사형제 그립다’라고 했다”고 과정을 설명한다. “내가 농민운동을 하면서 농민들에게 가르치고, 시대상황에 따라서 가사를 바꿔가지고 불러왔어. 그걸 보급한 게 1968년도부터야. 당시는 농촌운동, 농촌계몽운동이라고 했는데, 내가 농민운동이란 말이 일반화 되도록 했어. 노래도 농민가가 됐고.”
얘기를 종합하면 원래 농사단가로 만들어진 농민가의 작사자는 김성훈 전 장관이고, 곡은 고 이용화 선생이 러시아 곡조를 붙인 것이다. 이후 농민운동을 하면서 농민들에게 보급하고 시대에 맞게 수정, 개사한 이는 김준기 선생이다.

김성훈 전 장관이나 김준기 선생 두 분 모두 농사단 출신으로 한국 농업과 농민을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평생을 바쳐왔다. 노래를 만들고 보급한 이들이 있어 농민가는 시대를 상징하는 생명력을 얻었다.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를 거쳐 수십 년 지속된 군사독재와 민주화의 격변기에서 농민가는 민주화와 농민해방의 노래로 각인됐다.

하지만 1960년대나 지금이나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못했다. 하루 빨리 농민을 대접하는 세상이 열리길 고대한다. 그리하여 노래의 가사처럼 ‘찬란한 승리의 그 날’이 와서 모두 함께 거리에서 농민가와 해방춤을 신명나게 출 수 있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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