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이해영 한신대 교수

미-중, 미-베트남 국교정상화 선례 보면
남북미 신 데탕트는 이제 막 첫걸음
중요한건 속도 아닌 방향…조급해 말길


남북이 만나고, 북미가 만나고 떠들썩했다. 하지만 해는 저물어 가는데 별 신통수가 보이질 않는다. 남북이라도 마주 앉았으니 이것이 웬 떡이냐. 그것을 빼고는 뭐 하나 시원한 게 없다. 북미관계가 사실 핵심인데 지금 되어 가는 꼴로만 보자면 하세월이다. 미측은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못 잡아 안달이다.

유명무실한 유엔군사령부가 갑자기 등장해 감나라 대추나라 하질 않나, 남북 간에 비행금지구역을 자기 허락 없이 정했다고 미 국무장관이 호통을 친다. 남북경협에 열을 올리던 우리 은행 측에 미 재무성이 전화를 해서는 금강산이나 개성공단 지점 설치 여부를 따지고는 죽기 싫으면 알아서 하라고 했단다. ‘미국의 소리’라는 냉전시대 프로파간다 방송은 주구장창 김정은이 비핵화안할 거라는 주장만 틀어 댄다.

그래서 다른 역사적 선례들을 챙겨 본다.

1973년 10년에 걸친 전쟁을 끝내고 미·북베트남은 파리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여기에는 물론 남베트남과 베트콩의 대표도 참석했다. 하지만 이 조약 2년 뒤 남베트남정부는 붕괴되고 베트남은 통일된다. 이 평화협정은 대략 20여개의 조문과 다수의 합의의사록으로 이루어진 34쪽의 문서다. 통일 후 베트남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모색, 1978년 이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지만 실행에 옮겨지진 않는다.

미·베트남 국교가 정상화된 것은 1995년 클린턴대통령 때다. 1973년 파리평화조약이후부터 따지자면 무려 22년이 걸렸다. 이 때 와서야 미국은 비로소 대베트남 봉쇄를 해제한다.
1975∼1995년까지 양국은 근 이십년에 걸쳐 경제지원 또는 전후배상금 대 미군실종자, 전쟁포로 (MIA/POW) 문제를 놓고 지리 하기 짝이 없는 협상을 벌였다. 심지어 미·베트남 경제관계가 본격화된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다. 평화협정이후 근 30년이 걸려서다. 2015년에 와서는 항구적 통상파트너십 협정(PNTR)이 체결되었다.

특히 양국관계가 급속진전된 것은 미국의 대중봉쇄전략으로 베트남의 지정학적 위치의 전략적 비중이 커진 덕분이기도 하다. 일본과 더불어 베트남 역시 미국의 대중전략에 올라 타 실익을 챙긴 셈이다.

중국은 또 어떤가. 실제 6.12 북미데탕트 프로세스는 1972년 미중데탕트에 충분히 견줄만한 세계사적 대사변이다. 공산화된 이후 미중관계는 한반도에서 일전을 겨룬,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다. 심지어 60년대 초 중국이 핵개발에 나섰을 때 미국이 선제공격을 검토했을 정도다. ‘닉슨 중국에 가다’ 혹은 ‘닉슨 중국에 Nixon to China’는 세계외교사의 숙어가 된 지 오래다.

공화당의 강경우파였던 닉슨이 공산주의 중국과 관계정상화에 나섰을 때 사실 미 민주당은 선수를 빼앗긴 탓에 깊은 내상을 입었다. 닉슨과 그의 안보보좌관 키신저가 대중관계정상화에 나선 것은 중소분쟁을 활용해 중국을 분리시켜 소련을 고립시키고, 또 중국을 지렛대로 베트남과의 휴전협상을 용이케 하기 위한 전략적·지정학적 책략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소·동구권은 대체적으로 중국의 수정주의를 격렬히 비난했다.

1972년 미중 공동성명이후 미중은 낮은 단계에서부터 하나씩 신뢰구축에 나선다. 그러나 양국사이 정식국교가 수립된 것은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난 1979년 카터행정부 때다. 양국간 정식국교가 수립된 뒤 미국은 양국관계의 걸림돌이었던 대만문제를 정리한다.

즉 1955년 체결된 미·대만 상호방위조약 곧 미·대만 동맹을 폐기하고 약 3만명 규모 주대만 미군이 철수한다. 다시 말해 1972년 상해선언이후에도 닉슨탄핵, 미국 내 여론 그리고 대만문제 등 정치군사적 현안이 해소될 때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조차도 레이건정부에 와서 미국의 대만에 대한 새로운 안보 공약이 나오면서 다시 삐걱거리기도 했다. 미중관계가 안착되는 건 천안문사태이후 등소평노선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뒤였다. 닉슨선언이후 근 20년이 소요된 셈이다. 1990년대 와서야 비로소 미국의 대중 투자가 본격화되었다.

1972년 닉슨 방중이후 1979년 미·중 국교정상화까지 7년 걸렸고, 경제협력까지는 20년이 넘어 걸렸다. 1973년 파리평화협정이후 1995년 미·베트남 국교정상화까지 22년 걸렸다. 경제협력에는 근 30년이 걸렸다. 해서 이제 보니 남북미 신 데탕트는 막 첫걸음을 뗐을 뿐이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