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Food & Justice 지니스테이블 대표

작물의 다양성, 품종의 다양성 보장은 식문화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일이며, 상업화를 이유로 비정상이 된 생태계를 바로 잡는 정의로운 일로 먹거리 정의의 기본이다.


지금은 맛보기 힘든 품종이 되었지만 내 어린시절의 사과는 국광과 홍옥이었다. 연두빛의 인도라는 사과도 생각나고 작은 능금도 종종 먹었다. 각각의 사과 맛은 어린 내가 먹어봐도 확연히 달라서 신맛을 먹고 싶으면 홍옥을 먹었다. 그런데 어느새 국광도 홍옥도 능금도 시장에서 사라졌고 나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품종을 떠올리지 않고 그저 빨갛고 동그란 사과를 먹었다. 그 뒤 국광과 홍옥을 떠올린 건 20여년 전 미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였다. 길에서 사과 하나를 사먹었는데 둥그런 모양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새에 아삭하기보다는 퍼석거렸다. 딜리셔스 애플이라는 품종이었던 것 같다. 아! 사과의 품종이 하나가 아니였지. 새삼스럽게 옛 사과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과로 유명한 장수에 살면서 처음 만난 사과는 하니였다. 사과밭을 누비며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붉은 구슬을 따는 것처럼 사과를 따서 먹어보는 일은 낭만적이었다. 그 후 장수에 살면서도 하니를 별로 먹어보지 못했다. 모두 그러는 것처럼 가을에 홍로를 먹다가 겨울이 되면 후지를 먹었다. 그러다가 사과농부들과 친해지면서 시나노골드, 토키같은 노란 색깔 사과가 있다는 것도 홍금, 양광과 같은 사과가 있다는 것도 우리가 아오리라고 부르며 푸르게 먹는 사과가 쓰가루이고 익으면 빨개지는 사과라는 것도 알았다.

사과의 품종만 다양한 것이 아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수미, 남작, 대지와 같이 감자도 다양한 품종이 있다는 걸 알았다. 감자의 색깔도 노란빛만 있지 않고 자주감자, 붉은감자로 다양한 것도 알았다. 우리집 감자를 받아보시고 내 어릴 적 먹던 홍감자였다고 전화를 주신 분들도 계셨다. 호박도 둥근호박을 심었다. 둥근호박은 황금빛을 자랑하며 텃밭에서 늙어갔다. 텃밭 한쪽에 노란 참외도 심고 연두빛 곱고 달콤한 사과참외를 심기도 했다. 늘 신고배만 먹어왔는데 지인이 보내준 만풍배를 먹어보고선 감동하기도 했다. 작물 하나에 이렇게 다양한 품종들이 있는데 우리는 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다양한 맛의 세계를 만나볼 수 없게 됐을까?
농사는 먹기 위해 인위적으로 작물을 집단화해 키우는 일이므로 생산량 증대는 농사의 주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품종이 개량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생산량을 이유로 품종을 단일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종종 뉴스로 바나나 멸종론이 가십처럼 소개되곤 한다. 팩트 체크를 하는 기사들도 종종 보인다. 바나나는 캐번디시 단 한 종류로 유전자가 모두 같다. 물론 바나나가 전 세계에 단 한종류만 남은 것은 아니다. 여러 종류의 야생 바나나들이 있지만 상업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바나나가 캐번디시라는 것이며, 이 캐번디시가 병에 걸려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상업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바나나가 없다는 의미다. 수미 감자만, 홍로와 부사 사과만, 찰옥수수만 어느새 하나의 작물에 한두가지 품종의 생산과 유통이 대세가 되어버렸다. 단일 품종은 생산량 증대와 유통은 쉬울 수 있으나 생산 자체가 가로막힐 수 있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Good, Clean, Fair.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의 지향점이다. 슬로푸드 운동은 맛이 좋고(Good), 환경을 해하거나 오염시키지 않고 생태계를 해하거나 다른 생물의 권리와 건강을 위협하지 않으며(Clean), 생산부터 유통, 가공, 소비되는 모든 과정이 공정한(Fair) 음식을 먹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운동이다. 이런 음식 세상을 만들기 위해 슬로푸드 운동은 전통적이며 지속 가능한 음식과 식재료를 지키며, 경작법과 가공법을 보존하고, 가축과 야생 동물의 생물종 다양성을 보호한다. 그리고 맛의 방주(Ark of Taste) 프로젝트로 전통식재료와 음식을 유지하게 하며, 생물다양성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맛의 방주에 오른 품목들이 있다. 푸른빛이 도는 독새기콩으로 만든 제주푸른콩장, 토종배인 먹골 황실배, 청실배,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귤인 댕유지와 같은 품목들이다. 하나의 품종이나, 하나의 작물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음식, 하나의 식문화가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에 세상에 쌀이 사라진다면 그저 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밥이 없어지고, 밥을 먹던 문화가 사라지고, 설과 추석에 떡국과 송편을 먹는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다. 작물의 다양성, 품종의 다양성 보장은 식문화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일이며, 상업화를 이유로 비정상이 된 생태계를 바로 잡는 정의로운 일로 먹거리 정의의 기본이다.

추석이다. 올해 추석 차례상에는 홍로사과와 신고배가 오를 것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우리집은 어떤 품종의 사과와 배를 차례상에 올릴지 즐거운 고민을 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생산자들은 심고 싶은 다양한 품목을 심을 수 있도록, 다품종 지원금이라는 정책도 만들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일상이 다양한 품종의 다양한 맛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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