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폭염에 드러나는 불평등의 실상
농촌의 사회적 위기 징후 곳곳에 넘쳐 
‘농의 가치’를 아는 농민·시민 절실


택배기사, 건설노동자, 청소노동자, 집배원, 에어컨 수리기사 등 더위 속에 수고하는 분들을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자는 신문 사설이 여럿이다. 투명인간 취급 받는 이는 시민으로서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는 자이며, 누군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이는 시민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이다. 인정(認定)과 연대는 사회를 가능케 하는 토대다. 그런데 존재감이 한 푼도 없어서 인정자 명단에 이름을 못 올리는 직업군도 있다. 투명인간 중에 투명인간이라고나 할까. 바로 농민들이다.

염천(炎天) 아래 농민은 뵈지 않는다. 소비자생협 직원이 비닐하우스에 온도계 하나 들고 찾아왔다. 농작물 작황 조사 때문이란다. 채소 공급 차질을 걱정했을 테다. 다른 이웃 농장에 축산방역 당국의 전화가 왔다. 병든 산양 한 마리 죽이지 못해, 그냥저냥 키우던 놈이었다. 그 산양 죽지 않고 잘 있냐는 질문, 가축 전염병 관련 업무 전화다. “염소 안부 물을 시간 있으면, 이 더위에 시골 노인 안부를 챙겨봐라. 칭찬 들을 거다.”라는 탄식이 새나온다. 이 와중에 기막힌 뉴스를 봤다. 폭염이 길어지면 염려되는 게 가을철 김장 배추 가격이란다. 장바구니 물가가 제일 먼저다, 중요한 건 돈이니까. 농민 걱정하는 건 휴대폰에 뜨는 재난 안내 문자뿐이다. “전국에 폭염경보 발효 중, 논밭, 건설현장 등 야외작업 자제, 충분한 물 마시기 등 건강에 절대 유의 바랍니다.”

존재감을 못 얻은 사회 집단은 그냥 무시당하고 마는 게 아니라, 공공 행정이나 시장에서도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그런 배제가 때로는 생명을 좌우한다.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했다. 8월 5일 기준, 올해 여름 517개 응급의료기관에서 보고된 온열질환자가 3329명이었다. 논밭에서 병이 난 사람 숫자가 373명으로 11.2%를 차지한다. 7월 말 기준으로 공표된 65세 이상 온열질환자 집단 606명에만 한정하면, 25%인 152명이 논밭에서 일하다가 응급실에 실려 갔다. 전국에서 열사병, 열실신, 열경련 등의 사고를 당한 사람들 중 7.4%가 논밭에서 일하던 고령 농민이다. 온열질환 사망자는 27명 가운데 농촌 지역에서 발생한 사망이 18명, 절반을 한참 웃돈다. 온열질환 발병 및 사망 빈도가 농업 부문과 농촌 지역에서 유난히 높다. 농촌 주민이, 특히 고령 농민이 경험하는 사회적 불평등이 폭염을 계기로 폭로된다.

농촌의 미래를 논할 때, 이제는 사회적 차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농업과 사회 사이의 이격(離隔)이 심화된 현실, 그 자체가 경제적·환경적 위기와 더불어 농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삼중 위기를 구성한다. 농업·농촌에 대한 친숙함과 공감이 줄어들면서 농민에 대한 우호적 입장도 줄어들고 있다. 아니, 농민을 농촌에 투명인간으로 격리하는 듯한 조짐마저 보인다. 연간 농업생산액이 삼성전자의 3개월 매출액보다 적은 것은 스마트팜 등 첨단과학기술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매한 농민 탓이라고 우겨대는 우매한 언론지식인, 농업·농촌 정책을 책임지는 장관직을 반년 가까이 공석으로 두고도 별 말 없는 정부, 맛있고 안전하고 외관도 매끈하고 가격까지 싼 농산물을 찾지만 농민의 몫을 빼앗지 않고서야 그건 불가능하다는 점을 모르는 소비자, 농촌 생활을 꿈꾼다지만 정작 옷에 흙 묻는 것을 두려워하고 품앗이를 비합리적 관습이라고 타매하는 신출내기 귀촌 도시민, 복잡한 이론 모형이나 통계는 줄줄 꿰지만 논에 물을 가두는 까닭을 모르는 학자, 농작물의 생육 리듬과 행정서류 결재의 리듬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관료 및 공공기관 직원 등등. 농촌의 사회적 위기 징후는 곳곳에 넘친다. 특히, 농업·농촌의 가치와 의미를 사회에 알려내는 역할을 자임하며 창의적인 실천을 강구하는 농민은 드물고 시장에 예속된 채 ‘생산기계’로만 기능하는 농민은 많다는 점에서, 농촌의 미래는 어둡다.

자꾸만 의심하게 되는 것은, 가능성이 낮기도 하지만, 몇몇 농업 경영인이 농업으로 돈을 많이 벌면 농촌 문제가 정말 해결될 것이냐는 점이다. 결국, 농(農)의 가치를 아는 시민이 있어야 하리라.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알면 모른 체할 수 없다고 했던가? ‘농의 가치’를 안다는 것은 농업의 다원적 기능 따위를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인문(人紋)의 앎을 말한다. 가령, 빨간 사과 한 알에 얼비치는 가을 햇빛에서 어떤 삶의 역사를, 고단하지만 긍지어린 노동의 얼굴을,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 속에 피어오르는 어떤 공동체의 장면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모든 농촌의 미래를 구성하는 일은, 결국 농사지으며 농촌에 사는 살림살이의 건강함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새로운 농민’의 몫이다. 전 세계 농업이 현대화·산업화의 길을 걸어오면서 지금과 같은 먹거리 체계를 만들었고, 늙은 농민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다. 농민이 농사짓고 살아가는 방식에 큰 변화가 있었고,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 위기가 도래했고, 농민의 자율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농업 자원을 형성하고 관리하며, 시장을 피할 수는 없으나 예속되지는 않는 농사를 지으며, 농촌 환경과 지역사회를 돌보고 가꾸면서 보람과 긍지를 찾는 ‘새로운 농민’의 출현을 전 세계가 열망한다. ‘새로운 농민’이란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구성해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농민’이 걷는 길을 함께 걸으며 ‘새로운 시민’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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