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보람/전북 김제/청년·다문화 부문 최우수상

봄이 지나고 슬쩍 다가온 여름 안에서 내 주위의 모든 환경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무성했던 가지들은 초록하게 나무가 되었고, 휑했던 논들은 이제 막 심은 모로 가득하다. 밭들은 저마다 각자의 소중한 농산물을 품고 있는 계절. 나의 밭들은 고구마를 품느라 여념이 없다. 그 밭 속에서 나의 하루는 5시 반에 시작된다. 당연한 듯 보이는 이 농촌생활은 처음부터 나에게 맞는 옷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모님께서는 그 당시 합성피혁 공장을 운영하셨고 그로인한 부작용인지 나는 ‘아토피’라는 질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요즘 시대에 하도 흔해 ‘아토피’ 정도가 대수냐고 열에 하나는 가지고 있지 않냐고 물어볼 수 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아토피환자 중에서도 최상위였다. 전국 방방곳곳 좋다는 병원에 데려가 보았지만 결국 돌아온 대답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가세요”이었고 때마침 터진 IMF로 인해 부모님의 공장은 위기를 겪게 된다. 결국 부모님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귀농’을 결심하시게 된다.

서울에서 처음 귀농한 지역은 바로 ‘전라북도 정읍’이었다. 그때당시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정읍 내장산에서 민박집을 운영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귀농 한 그 곳에서 부모님은 한차례 더 위기를 겪으셨다. ‘우렁이사업’을 시작하셨는데 저수지에 있는 우렁을 잡아 장에 파니 돈이 되기에 열심히 잡아다 수돗가에 보관을 해서 내년 봄에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한해 열심히 잡아 저장한 우렁은 그 이듬해 봄이 되어 물을 퍼내고 보니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내 생각으로는 먹이가 없어 서로 잡아먹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시골로 귀농하여 처음 한 우렁이사업을 실패하고 부모님은 정읍을 떠나 고모가 계신 ‘전락북도 김제’ 로 두 번째 귀농을 하시게 된다. 우리 고모는 김제에서 쌀농사를 짓고 계셨다. 부모님생각에 김제에 가서 농사지으면 농기계는 빌려 쓸 수 있으니 김제로 귀농을 결심하셨다. 이때의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김제로 귀농을 하고 부모님께서는 진짜 본격적인 ‘농부’의 길을 걸으셨다. 전라북도 김제는 ‘쌀’이 유명한 지역으로 주민 대부분이 쌀농사를 짓고 계셨는데 우리 부모님은 쌀 이외에 감자, 고구마, 옥수수, 콩 등 다양한 작목을 조금씩 다 재배하시다 주작목으로 지역특산품이 아닌 ‘고구마’를 선택하셨다. 처음 1000평으로 시작한 고구마농사는 한해, 한해가 지날수록 늘어갔고 십만평으로 늘어난 밭으로 인해 부모님을 집에서 뵙는 건 힘들어졌다.

부모님의 속도 모르는 철부지 삼남매, 우리이야기다. 나는 삼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고, 둘째는 여동생, 셋째는 남동생이다. 처음 ‘귀농’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어린나이에 서울 살다 귀농했단 소리에 주변에서 "시골사니까 심심하지 않니?"라는 말을 많이들 하셨는데 우리는 전혀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논들에 모가 심어져있는지도 모르고 수영장인줄 알고 셋이서 논을 헤집고 다녀서 모 값을 물어줘야 했고, 하루는 양봉하는 게 신기해서 구경 가다 꿀벌에 잔뜩 쏘여 울면서 집에 왔고, 나무며 풀이며 비포장도로를 마음껏 누비고 뛰어다녔다. ‘귀농’은 심심함이 아닌 우리 삼남매에게는 놀이고 재미였다. 서울에서는 할 수 없었던 마당에서 뛰어노는 일도, 동물을 키우는 일도 가능했던 시골이 마냥 좋았다.

나는 초등학교는 시골에서 전교생이 100여명쯤 되는 초등학교를 나왔다.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모두가 같은 반, 같은 친구였다. 그러다 중학교를 시내로 나가게 되었는데 한 학년에 10개 반이나 되고 전교생이 1000명쯤 되는 학교로 가니 그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늘 흙이 묻은 신발을 신고 등교했고, 친구들의 부모님은 자가용으로 학교를 데려다 줄 때 나는 트럭을 타고 등교를 했다. 그 시절 감사한지 모르고 왜 이렇게 부모님의 직업이 부끄럽던지…. 또 친구들은 시골 사는 애 처음 본다며 놀려댔고 나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노는 대신 농사를 도와야 했고 방학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주말에, 방학에 부모님을 도우면서 나는 차츰 성장해나갔다. 부모님이 이렇게 힘들게 농사지어서 도시로 학교를 보내주시는 게 감사했고, 시골에서의 삶이 나와 잘 맞았는지 나는 차츰 건강해져갔다. 거기다 농사일도 잘되어 우리는 시골의 외딴집이 아닌 2층 저택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 마냥 행복한 나날들의 연속인 줄 알았지만 우리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내가 고등학교 재학 중 부모님은 더욱 농사에 욕심을 내셨다. 365일 정말 일개미처럼 여행 한 번 못가보고 일만하시던 부모님, 늘 흙투성이셨던 부모님께서 2층집을 구매하신 후 농사를 더 열심히 지으셨고 우리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하지만 한 해 수확한 고구마를 모두 저장하면서 문제는 시작되었고, 그 많은 고구마는 그 해 겨울 폭설로 인해 저장했던 하우스가 무너지면서 우리에게 빚으로 돌아왔다.

빚더미 속에서 2층집은 팔려나갔고 가지고 있던 자동차며, 창고며 모든 게 한순간에 사라졌다. 우리 가정의 화목도 깨져버렸다. 어머니는 매일 우시고, 아버지는 매일 술로 나날을 보내시고 나도 정말 힘들었다. 그러던 와중 부모님께서 나에게 국비지원이 되는 ‘한국농수산대’로 진학하길 권유하셨고 나는 “여자가 무슨 농대야!”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부모님께서 말하길 농업에 희망은 있는데 귀농해서 정보도 모르고 주먹구구식으로 농사만 짓다 보니까 실패를 한 거 같다며 나에게 전문적으로 농업을 배워서 ‘농업경영’을 해 보라고 권유하셨다. 나에게 생각?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단호하게 농사짓지 않고 농대도 진학하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그렇지만 내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고구마를 무지 좋아하는 거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나는 매일같이 고구마를 쪄서 간식으로 가지고 갔고, 친구들과 나눠먹다보니 하루 3개 쪄가던 고구마가 이튿날은 5개, 그 이튿날은 10개, 그 이튿날은 20개 어느 날 보니 어머니께서는 아침에 고구마를 한 솥단지 찌고 계셨다.

가방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채 책은 없고 고구마만 가지고 학교로 향했다. 반에 고구마 열풍이 불어 너도 나도 고구마를 쪄서 오기 시작했는데 친구들이 말하길 우리 집 고구마가 제일 맛있다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얘기했더니 부모님께서 구매하고 싶다고 한다며 나에게 고구마를 팔라고 권유했다. 그렇지만 우리 농장은 그 당시 농장이름도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택배판매도 이뤄지지 않고 있던 브랜드도 없는 그야말로 정말 옛날 농사 판매방식으로 판매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친구들의 주문을 뿌리쳤다. 그러던 와중 ‘이렇게 맛있는 고구마를 인터넷으로 팔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농업’에 대한 마음의 문을 한 발짝 열었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세무서에 찾아가 사업자등록을 냈다. 당시 나의 나이는 고등학교 3학년 열아홉살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이어 농대에 진학하게 된다.

농업전문학교인 한국농수산대학을 진학만 하면 나는 ‘농부’가 되는 줄 알았다. 막상 들어간 학교에서 고등학교시절 인문계에서 문과를 전공했던 나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고 여학생보다 많은 남학생의 비율에 기죽었으며, 부농의 자식들 사이에서 자존감은 하락해져갔다. 계속 내 길이 맞는지 고민했고 그 결과 나는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 판단해 자퇴를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부모님의 계속 된 설득으로 인해 1년만 더 다녀보자 라는 판단이 지금의 나를 청년여성농부로 만들게 되었다. 1학년 생활을 마치고 이제 2학년 실습생이 되던 해, 나는 국내의 유일한 고구마연구소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바이오에너지작물센터로 10개월간 실습을 자원했다.

그 당시 내가 알던 고구마의 종류는 밤고구마, 호박고구마 두 가지였는데 고구마연구소에서 만난 고구마들은 국내품종은 60여 가지, 해외품종은 600여 가지나 된다는 말에 나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고구마집 딸래미가 이런 것도 모르고 말이 되나 싶어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고구마연구소에서 실습하는 동안 나는 호기심 많은 이제 막 세상에 발 딛은 사람 같았다. 모든 게 신기했고 새로웠다.

그러던 와중 ‘꿀고구마’를 연구하는걸 보조했는데 먹어보니 맛도 좋고 또 밭에서 바이러스 저항력도 좋아 재배가 쉽다는 말에 부모님과 상의하여 우리 집에 꿀고구마를 처음 재배하게 되었다. 그때당시 우리지역에 최초로 꿀고구마가 그것도 우리 집에 도입된 것이다. 그 다음 해 고구마 중 꿀고구마 열풍이 불면서 우리 집은 많은 빚을 탕감하게 되었다. 그걸 지켜본 나는 농업이라는 게 1차 생산도 중요하지만 정보도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내가 해야되는 농업이 어떤 길인지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돌아온 시골에 나를 반겨주는 이는 없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들에 나의 자존감은 낮아졌다. “여자가 무슨 농사야?”, “공부를 못했나보다”, “취업이 안됐나 봐” 등등 나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친척들조차도 농업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나의 말에 다들 미쳤다고 대학까지 나온 애가 농사냐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얘기했다. 그러다 보니 외출은 없어졌고 나는 나를 농장 안에 가둬버렸다.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곳이라곤 부모님뿐이었다.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 할 때, 부모님께서는 정보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나를 믿어주셨다.

나는 고민했다. ‘이 시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부모님보다 잘 할 수 있을게 뭘까?’라고 고민 한 끝에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내가 왜 농부가 되려 했는지 돌아보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브랜드를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해야 될 일이였고 나는 1년 동안 고민하고 상의 한 끝에 ‘아빠와 딸이 함께하는 고구마농장’ 바로 '강보람고구마'를 만들어낸다. 자본이 필요해 알바도 하고 부모님께서 보태주신 돈을 모아보니 300만원으로 시작했다. 인터넷 고구마쇼핑몰을 오픈했고, 고구마 포장 박스도 기존 20kg와 10kg가 대부분인 기존과 다르게 핵가족을 겨냥해 3kg로 다 바꾸었다.

브랜드를 만들고 쇼핑몰만 오픈하면 그냥 알아서 잘 팔리는 줄 알았다. 현실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홍보와 마케팅이 전혀 안되었는데 고구마가 팔릴 리가 없었다. 오픈 첫 달에 3kg 한 박스를 팔았다. 두 번째 달에는 두 박스를 판매했다.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야 했다. 내가 파악한 원인은 바로 ‘홍보, 마케팅이 안 되어 있어서’였다.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더 이상 투자 없이 홍보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 끝 내린 결론은 SNS. 그 중에 블로그였다.

블로그에 농사 일상을 올렸고 반응이 없자 검색량을 늘리기 위해 맛집, 여행, 농산물 등 다양하게 포스팅을 했다. 사람들이 점점 들어왔고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농사짓는 거 맞아요?’ 라고 내가 생각했던 댓글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각종 TV, 기사를 통해 청년농부들이 주목받는 시기가 아니었기에 스물네살의 내가 농사짓는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나는 그들을 설득시키려 노력했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변명보다는 꾸준히 내이야기를 올렸다. 나의 농사이야기를, 그러자 1년쯤 지나니 댓글이 바뀌기 시작했다. ‘농사 안 짓게 생겼다, 농사짓는 거 맞냐?’ 이런 댓글이 ‘보람씨가 기른 농산물 먹어보고 싶어요’로 바뀌면서 나에게도 단골고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꿈만 같았다. 한 달에 한 박스를 팔던 내가 직접 내 손으로 내가 기른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에 마음이 뭉클했다. 또 한 번 나의 이야기는 기적을 펼쳐냈다. 내가 직접 디자인한 농산물 박스가 도매시장에 나가자 반응이 뜨거웠다. 그 전에 시큰둥했던 도매시장들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강보람고구마 납품해 달라고. 기존 디자인과 다르게 농산물이 아닌 나와 아빠의 캐리커처를 넣어 디자인하고 이름을 넣은 브랜드는 소비자들에게 신뢰감을 줬고, 특별한 디자인으로 기억에 오래 남겼다.

그리고나서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 찾아왔다. 바로 방송국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거절하다, 거절하다 나간 방송에서 나와 부모님이 함께 기른 고구마의 사연은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주문전화가 폭주를 했지만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가족은 촬영하기 전날 막 수확한 고구마를 대기업에게 판매를 하고 고구마가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던 상태에서 방송에 나가 제대로 팔아보진 못했다. 6000건 정도의 주문이 왔는데 “다음 수확까지 2주 정도를 기다려주셔야 합니다”라는 내 말에 기다려 주신 분은 열 분정도였다. 판매는 실패했지만 방송으로 달라진 점이 생겼다. 그 전에 여자가 농사짓는다고 구박하던 친척들, 그리고 동네사람들 모두가 바뀌었다. 취업하기 전까지만 농사짓는 거겠지 생각하시던 분들도 계셨지만 방송을 보시고 내가 하려는 농업을 응원해 주시기로 했다. 직업이 뭐냐고 묻던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농부’라고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내가 내 직업인 ‘농업’을 인정하고 나니 비로소 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농부’라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나에게는 각종 티비 출연이 쏟아졌고 나가는 방송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나는 ‘스타농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스타농부’가 되니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주시고 내 고구마를 인정해주시는 거 같아 마냥 좋았다. 그냥 즐거웠다. 2016년 3년차 농부가 되었을 때에 나는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서 경매 최고가를 받으며, 대한민국의 우수한 고구마브랜드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행복하기만 한 시간들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최악의 가뭄으로 인해 고구마 생산이 부실했다. 내가 생각하는 맛, 모양이 있는데 그걸 따라오지 못했다. 내 고구마를 기다리는 고객들이 많았지만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고구마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모두가 의아했다. 알아서 잘 팔리는 고구마를 팔지 않겠다니. 나는 내 소견을 지켰다. 부모님도 설득했다. 앞으로 우리 브랜드가 성장하려면 지금 당장 손해 보더라도 좋은 고구마, 맛있는 고구마만 판매하자고 그 길로 고구마를 전량 가공공장으로 헐값에 보냈다. 그리고 내년에는 더 좋은 고구마를 생산하기로 다짐했다.

가치 있는 브랜드를 만들려는 내 고집을 하늘도 알아줬는지 이듬해에는 농사가 잘 되고 판매도 원활하게 이뤄졌다. 농협중앙회에서 개최한 농산물크라우드펀딩에서 1등을 차지했고, 홍콩대형마트에서도 연락이 왔다. 고구마를 납품해 달라고.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1차농산물 해외수출이라니! 2017년은 온전히 고구마 수출에 전념했다. 새로운 판로를 확장시키겠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원물인 고구마 수출하는 과정에서 부패가 일어났고 나는 또 한 번 좌절했다. 해외에서 부패가 되면 폐기비용까지 물어야 되어서 손해가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양한 시도를 했다. 온도를 바꿔보기도 했고 포장지를 바꿔보기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던 와중 홍콩에서 초대를 받고 현지에 다녀왔는데 내 고구마가, 한국산이라는 이름을 걸고 판매하는 고구마가 현지에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부패만 되지 않는다면 일주일도 안 되어서 완판 됐고, 내가 방문했을 때도 많은 사람이 고구마를 사갔다. 현지 회장님께서 전세계의 고구마 중 내가 기른 한국고구마가 가장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 할 수 없었다. 한국으로 와서 고구마 수출의 부패를 막기 위한 대응을 찾기 시작했다. 각종 기관에 문의하던 중 SNS에 올린 글을 보고 전라북도청과 농촌진흥청장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셨다. 농촌진흥청에서 대답해주시길, 아직 고구마해외수출은 어렵다고 많은 지역에서 하다 포기했다고 하셨다. 저는 그래도 해야겠다고 꼭 성공시켜야겠다고 얘기했더니 올해엔 같이 부패를 줄이는 방향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게 바로 청년농부가 해야 할 숙제 같아서다. 내가 부패문제를 잡고 새로운 판로를 개척한다면 뒤 따라올 후배 농부들에게도 먼저 간 선배로써 또 다른 길을 개척해 줄 수 있으니까. 누군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면 바로 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5년차, 스물일곱의 청년농부는 한 해 한 해 성장통을 겪으며 진정한 농부가 되려 하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꿈 많던 청춘의 나는 지금 농업 안에서 모든 꿈을 다 이뤘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청춘은 세상에 농업을 알리려 강단에 서고, 연예인이 되고 싶던 청춘은 각종 TV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그 꿈을 이루고, 작가가 되고 싶던 청춘은 지지난해 글짓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그 꿈을 이루고, 리포터가 되고 싶던 청춘은 농업크리에이터로 1인 농업방송을 시작하면서 그 꿈을 이뤘다. 이렇듯 농업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저 막노동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농업은 정말 만능엔터테이너다. 농업경영, 농업마케팅, 농업회계, 농업디자인, 농업작가, 농업강사, 농업크리에이터 등 농업은 많은 것을 포용하고 많은 것을 잘해야 한다. 지금 스물일곱의 나는 박사농부다. 좀 더 멋진 농부가 되기 위해 매주 서울로 대학원을 다녀 창업학석사를 획득했고, 올해는 박사과정에 합격하여 매주 무역학을 공부하고 있다. 농사지을 시간도 바쁜데 계속 공부를 하는 이유는 농부는 공부를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주고 싶기도 했고, 내가 부족한 부분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배움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농업에 접목시키는가는 나를 성장시켜주는 계기가 된다.

마을의 가장 어린 사장님, 바로 나다. 처음 농장의 대표라고 날 소개했을 때, 일하러 오신 이모님들은 코웃음을 치셨다. 대표라고 말했지만 호칭은 “야” 또는 “보람”, “학생” 이었다. 손주뻘 되는 애가 사장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거 같다. 내 어린 초등학교시절부터 봐왔던 분들인데 머리 좀 컸다고 사장행세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기다. 5년이 지난 지금 이모님들이 날 부르는 호칭은 바뀌었다. 바로 “사장님.” 인정받는 다는 건 마냥 좋기도 하지만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함께 하는 것이다. 농장의 대표로 인정받는 순간 내 어깨는 무거워졌다. 올해 고구마순을 심는 신제품 농기계를 구입했다. 고구마 심는 철이 끝나가는 5월말인 지금까지 그 기계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먼지만 쌓여간다. 농기계를 사고 보니 이 기계를 사용하면 30명의 인력을 5명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좋겠지만 우리 인부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드니 기계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일 하게 해드리는 게 목표였는데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하는 게 목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를 과감히 포기하고 올해는 특별하게 모든 이모님들에게 감사장을 나눠드렸다.

농업은 돈을 쫒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지극히 가난을 겪어봤고 교복 살 돈이 없어서 울어봤다. 먹거리를 생산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농사를 짓는 것, 그게 바로 농부의 사명이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앞으로 어떤 농업을 하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에 나는 우리 농부들, 그리고 농촌이 잘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고 싶다고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이름처럼 보람찬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나는 오늘도 50명의 인부들과 함께 7만평의 고구마밭으로 출근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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