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정 ‘전망 없음’ 인정하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정섭 박사의 연구보고서나 글을 읽다보면 자주 호출되는 학자가 있다. 네덜란드의 농촌사회학자인 얀 다우 판 더르 플루흐(Jan Douwe van der Ploeg)다. 2017년 1월까지 네덜란드 와게닝엔 농업대학교 석좌연구교수로 있으면서 10여년간 중국농업대학 사회과학부(베이징)의 겸임교수로도 활동한 플루흐는 한국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판적 농업 연구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학자다.

최근 플루흐의 2013년 저서 <농민과 농업-차야노프의 사상을 재조명하다>가 출판사 따비에서 출간됐다. 이 책의 번역을 맡은 이는 김정섭 박사. 충남 홍성군 장곡면의 젊은협업농장에 머물면서 ‘그 어느 해보다 바쁘게’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플루흐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플루흐의 저술을 처음 접한 건 박사 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던 2000년 무렵이다. 논문 주제가‘고추 재배농가들의 영농양식’이었는데, 플루흐의 ‘영농 스타일(Farming Styles)’ 연구가 큰 도움이 됐다. 농민들과 깊숙이 대화하고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다양한 영농활동이 출현하는 이유와 맥락을 포착하는 접근방법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플루흐는 ‘영농 스타일’ 연구로부터 진화한 개념인 ‘영농양식(mode of farming)’을 핵심 개념으로 내놓고, 현존하는 농업 실천의 방식을 자본주의적 영농양식, 경영자형 영농양식, 농민 영농양식 등 3가지로 유형화한다. 이 가운데 플루흐가 각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농민 영농양식’이다.”


-이유는.

“무엇보다 자본주의형이나 경영자형보다 농민 농업이 농촌사회의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기업농의 목적은 수익성의 극대화다. 때문에 이윤이 남지 않으면 농업을 포기한다. 하지만 농민들은 아니다. 이윤이 없어도, 농촌에서 먹고 살 수만 있으면 영농활동을 지속한다. 농민 농업이 자본주의체제와 불화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전 세계 먹거리의 70% 이상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농업의 발전은 엄밀히 말해 과학기술이 아니라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농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농민과 농업>
얀 다우 판 더르 플루흐 지음
김정섭·유찬희 옮김
따비, 2018

-책에서 플루흐는 ‘농민들이 돌아온다’면서 중국과 브라질, 서유럽의 소농 사례들을 근거로 재농민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농민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소비재뿐 아니라 영농을 위한 종자, 농기계, 비료 등을 모두 시장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로 인해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은 위기를 맞고 있고, 농민의 자율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 플루흐는 ‘재농민화(repeasatization)’, 즉 농민 농업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이런 시장에 대한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농민은 ‘빚’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농업 자원을 형성·관리하며, 시장을 피할 수는 없으나 예속되지는 않는 농사를 짓는 농민, 농촌 환경과 지역사회를 돌보고 가꾸면서 보람과 긍지를 찾는 농민이다.”


-그러나 최근의 스마트팜 혁신밸리 논란 등에서 보듯 여전히 우리나라 정책당국은 경영자형, 기업형 영농을 중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대놓고 얘기하지 않을 뿐 1990년대 시작된 농업구조조정 정책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지난 20년간 정부는 전업화·규모화를 목표로 각종 보조사업 몰아주기를 추진해 왔다. 농업·농촌의 미래를 고민해서 나온 정책이 아니다. 관료들도, 연구자들도 시골동네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윗사람들이 보기에 뭔가 새롭고, 뭔가 눈길을 끌만한 정책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그의 목소리는 높아졌다. 그는 우리 농정의 진짜 문제는 ‘전망 없음’이라고 꼬집었다. 이제 아무도 중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농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위기감이 크다고 했다. “전망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저 바닥에서부터. 나를 포함해 관료들도, 연구자들도, 농민단체들도. 외국사례 들이대기 전에 국내 현실에 대한 촘촘하고 밀도 있는 진단이 먼저다. 하나하나 따져보고, 토론하고, 소통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는 요즘 플루흐의 또 다른 책 <새로운 농민(The New Peasanstries)>을 번역 중이다. 번역 작업을 하던 중에 얼마 전 개정 증보판이 나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 중인데, 연말이면 출간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농민 문제나 농촌사회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연구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시대, 주류 담론에 저항하는 새로운 연구 흐름을 소개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우리 농업계에 활발한 논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김선아 기자 kimsa@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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