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맞서는 짱짱한 목소리…이 시대 ‘어른’을 만나다

 

NGO 대표 공개적 사양
지난해 ‘셀프 퇴임’ 화제
노욕 경계하면서도
‘나홀로 시민운동’ 계속

‘내 천직은 시민운동’
안전한 밥상 지키는 일
수고 아끼지 않아


“(국가는) 이윤과 이익만을 탐하는 유해 식품기업 산업자본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보살펴야 한다. 안전한 식품을 선택할 권리는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천부적인 권리다.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기며 산다. 이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이며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길이다. 농은 생명이며, 밥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지난 6월23일로 팔순을 맞은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 ‘농(農)은 생명이고 밥이 민주주의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도서출판 따비, 351쪽). 이 책은 2014년 발간한 ‘워낭소리, 인생 3모작의 이야기’의 후속편이기도 하다.

김 전 장관은 나이 팔순을 앞두고 지난해 경실련 등 모든 시민단체의 총회에 차례로 참석해 ‘셀프 퇴임’을 선언했다. “시민운동은 정년이 없다보니, 80세가 되어 주책없이 NGO 책임을 맡는 일을 공개적으로 사양한 것”이란 설명이다. 그러나 그는 선량한 서민들의 안전한 밥상을 지키는 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지금도 아파트 옥상에서 쿠바식 상자농법으로 유기농 농사를 계속하면서 유전자조작식품(GMO)을 반대하는 칼럼을 통해 ‘나 홀로 시민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역시 내 천직은 시민운동”이며, 이 책 또한 그 일환이다.

김 전 장관은 이 책의 서언인 ‘농훈(農薰) 김성훈이 걸어온 길, 인생 여든의 들머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다. 일제 강점기에 목포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유년을 보내고, 해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초등학교 때 한국전쟁을 맞은 그는 와중에도 무대포로 책을 읽었다. 평생의 전공인 농업 농촌 농민 연구 외에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해박하고도 깊은 지식을 자랑하는 비결은 소싯적부터 분야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책을 읽은 덕분이다.

김 전 장관은 동네 구장 겸 협동조합 운동을 하시던 어버님의 권유로 중학교 때 4H 구락부 활동을 한 뒤 농업 농촌 농민을 살리겠다고 서울대 농대에 진학했다. 거기서 그는 뜻을 같이하는 임유길, 김정웅, 오호성, 조동주, 이영선 등과 함께 농대 ‘한얼’ 모임을 만들었다.

3학년 때는 농대생 1000여명을 이끌고 수원에서 서울대 문리대까지 100리길 강행군에 나섰다. “농촌은 외친다, 도시부터 개혁하자”고 외치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대신해 장경순 농림부 장관을 면담, 획기적인 농정개혁과 사회혁신을 요구했다. 이어 수원 4.19 학생시위와 서울 100리 강행군에 참여한 이들을 중심으로 학생농민단체인 농사단(農士團)을 만들었다. 당시 농사단가가 훗날 ‘농민가’로, 김 전 장관이 작사하고 이용화가 소련 노래의 곡조를 붙인 노래라는 사실이 노무현 정부 와서야 알려지게 된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UN 식량농업기구(FAO)의 ‘아시아 태평양지역 유통 · 금융 · 협동조합 담당관’으로 일했다. 이후 경실련, 내셔널트러스트, 환경정의 등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UR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성천 류달영 선생과 함께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창립과 한국농어민신문 창간에 밑거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광우병 우려 쇠고기 수입 반대, 4대강 운하 반대 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정치를 멀리하려 했지만, 1998~2000년 DJ의 부름으로 국민의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어 농정개혁에 매진했고, 이를 “평생 명예를 지키며 학문과 진리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할 나의 인생에 치명적인 외도였다”고 술회한다.

그는 책의 1부 ‘GMO, 죽음의 밥상을 걷어치워라’에서 밥이 민주주의인 이유를 설명하고, 초국적 거대기업 몬산토의 야심부터, GMO를 옹호하는 한국의 공무원들과 청부 과학자들, 거대 식품기업들의 행태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2부 ‘3농, 농민을 살리고 농업을 살려야 나라가 산다’에서는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니라 기업(coporation)이 세상을 지배하는 코퍼라토크라시의 폐해를 지적하고, 기업이 아닌 사람 중심의 경제, 농민 중심의 농정을 역설한다. 시급한 과제로 학교 급식에서 GMO 퇴출, GMO 완전표시제 실시, 농촌진흥청 개혁, 농림축산식품부와 산하기관의 기능 및 조직을 축소 재정비, 농정의 획기적인 지방분권화, 농가기본소득제, 여성농업인과 농촌청년 및 귀농귀촌인 배려 등을 제시한다.

3부, ‘상생, 더불어 살며 미래를 그리다’에는 고 농민 백남기 선생, 인농 박재일 선생(한살림), 레이첼카슨(생태주의자), 장보고와 이순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남북 농업협력, 농민과 국민의 상생, 지역 상생,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일깨운다. 4부 ‘함께 나눈 말과 생각’에는 한국농어민신문 창간 기념 김지식 한농연 회장과의 대담(2018년 4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과의 대담 등이 실렸다.

인생 여든의 들머리라지만, 김 전장관의 소년 같은 모습,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짱짱한 목소리, 독자를 빨려들게 하는 글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셀프 퇴임으로 노욕을 경계하면서도, 3농과 먹거리 문제 해결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석학에게서 이 시대에 아주 드문 ‘어른’의 모습을 본다.

이상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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