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문 본보 전 편집국장
힘들었지만 자부심 가득했던 ‘내 인생의 황금기’


마감날마다 전쟁터 같았던 편집국
농어민후계자·전문가 포진한 덕에
비판 물론 대안 제시도 거침없이
1매짜리 가십기사에도 뜨거운 반응

기사 작성법도 몰랐던 신참에서
어깨 무거웠던 편집국장까지
찬란했던 ‘청춘의 시간’에 감사

한국농어민신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이다. 논문을 준비하던 당시 지도교수의 권유로 서울 용산시장(지금은 전자상가)에 있던 (사)농산물유통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마침 연구소에서는 농산물 가격을 조사해서 간단한 동향을 싣는 4쪽 분량의 4×6배판 농산물 유통정보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여기에 참가했다.

주간이었지만 매일 매일의 품목별 가격과 동향 등을 취재하기 위해 새벽에 출근해 유통인들과 만나야 했으며, 해장술(?)을 함께 마시기도 했다. 이 유통인들은 대부분 가락시장으로 이전했고, 지금도 만남을 계속하는 이들이 있다. 이 유통정보지가 바로 한국농어민신문의 모태다.

그러던 1984년, 연구소는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으로 확대 개편됐고 여기서 타블로이드판 주간 농축수산유통정보지가 만들어진다. 신문 형태의 조직이 구성됐고 외부에서 일간지 출신의 기자들을 모셔왔다. 기사 작성법조차 몰랐던 필자도 기자로 참가한다. 선배 기자들로부터의 배움과 개인적인 노력 끝에 기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1면 머리기사가 실리기까지 5개월여가 흐른 것으로 기억난다.

그러나 재정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박봉에다 월급을 제 날짜에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선배 기자들이 하나 둘 떠나갔고, 그 일은 오롯이 남아 있는 기자의 몫이었다. 신문 발행이 무척 힘들었다.

지금은 컴퓨터로 신문을 만들지만, 그때만 해도 원고지에 기사를 쓰면 공무국에서 청타로 친 후 이를 대지에 붙이는 형식이었다. 큰 글씨의 제목은 지활자란 종이에서 일일이 오려서 붙여야 했다. 턱없이 부족한 인원 탓에 주간지였지만 마감 날이면 밤을 세우기 일쑤였다. 야근수당도 없었다. 1980년대 생소했던 농수산물 유통분야에 새 지평을 연다는 자부심과 다른 농업 관련 신문보다 더 낫게 만들겠다는 오기로 버텼다.

1990년 드디어 한국농어민신문이 탄생한다. 농어민후계자(현 농업경영인) 조직이 구성돼 거기서 5억원이 모아졌고, 연구원의 조직과 시설 그동안의 신문발행 경험 등을 5억원으로 계산해서 자본금 10억원의 한국농어민신문사가 설립됐다. 산학협동이면서 농어민이 발행 주체로 참가하는 세계 최초의 신문이 나온 것이다.

재정이 확보되고 체계가 갖춰지면서 신문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비판을 하면서도 항상 대안을 제시했다. 현장에 농어민후계자 조직이 있었고, 연구원의 교수 등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도 자료를 베끼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무조건 단신 처리였다. 반드시 가공 처리해야 했고, 자료 자체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야 했다. 보도 자료를 분석하고 추가 취재를 통한 특종도 터졌다. 기자들은 무조건 현장으로 나갔고, 오후엔 귀사해서 기자작성에 몰두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시기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신문에 실리는 농어업 관련 기사 한줄 한줄은 큰 반향을 불렀다. 기사가 나가면 현장에선 즉각 반응이 왔고, 농업정책이 기사를 반영했다. 원고지 1장 분량의 가십(당시 사발통문)거리에도 전화가 올 정도였다. 신문이 적었고 현재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대상황도 반영된 결과였으리라.

신문 마감시간이면 기사를 확인하고 광고를 챙겨야 하는 등 편집국은 전쟁터였다. 정부 관련기관, 기업체 등 홍보실 관계자들의 방문도 줄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비판기사를 빼달라거나 비판의 강도를 낮춰달라는 등의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언론중재위원회의 단골손님이었다. 자부심도 컸지만, 책임도 뒤따랐다. 특히 편집국장의 역할은 막중했다. 그 직책을 맡던 5년여동안 그만큼 스트레스가 쌓여 갔고, 건강에 이상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떴고, 신문사도 사직했다.

청춘을 다 보내면서 기자부터 시작해서 한국농어민신문에서의 20여년간 생활은 60대에 접어든 지금 생각에도 인생의 황금기였다. 이제 신문이 역사적인 지령 3000호를 맞는다고 한다. 비록 몸은 떠났지만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전국의 농어민은 물론 관련 기관·단체들에게 꼭 필요한 신문으로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하신 여러 선배님과 동료, 후배기자, 그리고 신문사를 거쳐 갔거나 현재 근무중인 모든 임직원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특히 구독자 여러분들에게 앞으로도 변함없는 관심과 채찍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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