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4×6배판 크기의 주간 농산물유통정보가 만들어진지 10년만인 1990년 4월 10일.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와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이 공동 출자, 한국농어민신문을 재 창간함으로써 한국 전문 언론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농어민후계자 십시일반…세계 유일 ‘농민 주주’ 신문으로 우뚝

한국농어민신문이 3000개의 계단을 올라왔다. 38년의 시간이 걸렸다. 1980년 7월 4일 4×6배판 크기의 주간 농산물 유통정보지로 태동해 타블로이드판 주간 농축수산유통정보, 1990년 한국농어민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었지만 단 한 번의 중단도 없이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성장해온 땀과 열정이 밴 희로애락의 발자취다.


“유통개혁 없인 농민 소득 못올려”
국내 첫 농산물 가격정보지로 태동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창립하면서
1인당 1만원씩 모아 신문사 설립
창간 10년 만에 ‘도약 발판’
80년 창간 후 38년 한결같이
‘한국 농어업 길잡이’로 뚜벅뚜벅

▲ 1980년 4×6배판으로 발간을 시작한 주간 농산물유통정보(사진 왼쪽)는 1984년 주간 농축수산유통정보로 제호를 바꿔 1989년까지 타블로이드 판형으로 발간됐다.

▲한국농어민신문 모태, 주간 농산물유통정보지=극심한 냉해로 인한 흉작은 너무나 참혹했다. 그것도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연속 3년간이었다. 결국 쌀이 대량 수입됐고, 농림어업 성장률은 마이너스 22%를 기록할 만큼 뚝 떨어졌다. 당연히 식량자급률은 곤두박질쳤고, 농가소득은 악화됐다.

이처럼 척박하고 가혹했던 1980년 초여름(7월 4일), 한국농어민신문은 태어났다. 4×6배판 크기의 4쪽짜리 주간 농산물유통정보지 500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산물 가격정보지이자 한국농어민신문의 태동이었다. 정보지 발행은 1980년 4월 28일에 설립한 전국농업기술자협회 부설 농산물유통연구소가 주도했다. 당시 전국농업기술자협회 총재로서 농산물유통연구소장을 겸하고 계셨던 고 류달영 박사가 농산물유통정보지 발행인을 맡았고, 김병태 교수, 김성훈 교수가 연구위원으로 참여했다.

농산물 유통에 대한 개념과 시스템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농민들은 내가 재배한 농산물에 대한 가격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던 그 시절, 비록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농산물유통정보지를 통해 공개된 주요 농산물 가격과 동향은 출하주인 농민들은 물론 상인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농산물유통연구소 사무국장이었던 황의충 한국농어민신문 초대 사장은 “농산물 유통개선 없이 농민 소득을 올릴 방법이 없다는 사명감을 갖고 365일 시장을 돌면서 70개 품목을 상·중·하로 구분해 가격과 동향을 조사했다”면서 “첫 호가 발행되자 용산시장 위탁상인들이 몰려와 정보지 때문에 장사하기 어렵게 됐다며 항의를 했지만 농민들은 고맙다는 편지을 보내거나 직접 찾아와 식사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정보지 제작뿐만 아니라 강연, 세미나를 통해 선진국 유통제도 및 시스템을 널리 알리고 농민들에게 올바른 출하방식을 교육시키는 것도 농산물유통연구소의 몫이었다. 일본·대만의 농업선진국 연수, 농민과 상인들의 정기적 교육, 자영농고 학생 농산물 현장워크숍, 방송국 가격동향 프로그램 출연 등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다.

특히 당시 연구소 유통정보실장으로 KBS, MBC 방송국에 출연해 농산물 가격동향을 전문적으로 해설했던 황민영 한국농어민신문 제2대 사장의 역할이 매우 컸다. 방송 출연을 통해 농산물 유통의 중요성과 문제점을 낱낱이 들춰냈고, 한국농어민신문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일조했다.
4년 뒤인 1984년. 농산물유통연구소는 전국농업기술자협회 부설에서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으로 사단법인화되면서 확대 개편됐고, 신문의 제호도 주간 농축수산유통정보로 바뀌었다. 타블로이드판 20면 표지칼라로 지면도 확대되면서 점차 신문의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 <왼쪽>한국농어민신문 모태인 주간 농산물유통정보 창간을 주도했던 고 류달영 박사와 김병태 교수. <오른쪽>1989년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와 한국농어민신문은 농협 개혁활동의 시발점이 됐던 협동조합운동 교육과정을 개설, 운영했다.
▲ 한국농어민신문 재창간 후 첫번째로 열린 전국지사지국장연수회.


▲농어민이 주주인 세계유일의 농업전문 언론=1987년 12월 9일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창립에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이 상당한 역할을 하면서 두 단체는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더욱이 1988년말 고 이경해 열사가 전후협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전후협 사무실이 신문사 옆 건물로 이전하면서 공조체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무엇보다 1989년 전북 무주에서 제1회 전후협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된 후 연구원은 신문 보급 확대를 위해 전후협이라는 조직기반이 필요했고, 전후협은 단체를 대변할 언론조직이 요구되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 전후협은 당시 5만 농어민후계자 1인당 1만원씩을 출자해 5억원을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원의 고 황해룡 이사, 김수혁 이사 등이 적극 참여했고, 최병룡 전후협 초대 사무총장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결국 농축수산유통연구원의 모든 재산과 가치를 평가한 5억원, 전후협 5억원 등 10억원의 출자금으로 1990년 4월 10일 ㈜한국농어민후계자신문사가 설립됐다. 신문 제호는 '한국농어민신문'으로, 대판 12면 주1회 발간이었다. 창간 10년만의 큰 변화이자 발전이며 도약의 시작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농업인이 주주인 농업전문 언론의 탄생이기도 했다. 

당시 이경해 열사는 한국농어민후계자신문사 설립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농어민후계자대회를 준비하면서 아직 조직력이 취약하고 지방조직이 활성화되지 못한 전후협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소식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경해 열사의 결단이 있었기에 한국농어민신문 재창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1년에 ㈜한국농어민신문으로 신문사 명칭이 변경됐다.

‘한국농어민신문은 지난 10년간 주간농축수산유통정보를 통하여 축적된 경험과 굳건하게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주주이자 독자인 농어민후계자를 중심으로 21세기 한국농수산업, 농어촌, 농어민의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조용한 개혁의 기수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농어민신문의 창간의 의미이자 우리 모두의 다짐이 되어야 한다.’ 1990년 재창간의 사설 내용 중 일부분이다. 지령 3000호를 맞아 한국농어민신문이 창간의 뜻을 되새겨 주주이자 독자인 농업경영인, 농업인들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정문기 논설위원 jungmk@agrinet.co.kr


한국농어민신문과 나의 인연/장용문 본보 전 편집국장
힘들었지만 자부심 가득했던 ‘내 인생의 황금기’


마감날마다 전쟁터 같았던 편집국
농어민후계자·전문가 포진한 덕에
비판 물론 대안 제시도 거침없이
1매짜리 가십기사에도 뜨거운 반응

기사 작성법도 몰랐던 신참에서
어깨 무거웠던 편집국장까지
찬란했던 ‘청춘의 시간’에 감사

한국농어민신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이다. 논문을 준비하던 당시 지도교수의 권유로 서울 용산시장(지금은 전자상가)에 있던 (사)농산물유통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마침 연구소에서는 농산물 가격을 조사해서 간단한 동향을 싣는 4쪽 분량의 4×6배판 농산물 유통정보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여기에 참가했다.

주간이었지만 매일 매일의 품목별 가격과 동향 등을 취재하기 위해 새벽에 출근해 유통인들과 만나야 했으며, 해장술(?)을 함께 마시기도 했다. 이 유통인들은 대부분 가락시장으로 이전했고, 지금도 만남을 계속하는 이들이 있다. 이 유통정보지가 바로 한국농어민신문의 모태다.

그러던 1984년, 연구소는 한국농축수산유통연구원으로 확대 개편됐고 여기서 타블로이드판 주간 농축수산유통정보지가 만들어진다. 신문 형태의 조직이 구성됐고 외부에서 일간지 출신의 기자들을 모셔왔다. 기사 작성법조차 몰랐던 필자도 기자로 참가한다. 선배 기자들로부터의 배움과 개인적인 노력 끝에 기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1면 머리기사가 실리기까지 5개월여가 흐른 것으로 기억난다.

그러나 재정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박봉에다 월급을 제 날짜에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선배 기자들이 하나 둘 떠나갔고, 그 일은 오롯이 남아 있는 기자의 몫이었다. 신문 발행이 무척 힘들었다.

지금은 컴퓨터로 신문을 만들지만, 그때만 해도 원고지에 기사를 쓰면 공무국에서 청타로 친 후 이를 대지에 붙이는 형식이었다. 큰 글씨의 제목은 지활자란 종이에서 일일이 오려서 붙여야 했다. 턱없이 부족한 인원 탓에 주간지였지만 마감 날이면 밤을 세우기 일쑤였다. 야근수당도 없었다. 1980년대 생소했던 농수산물 유통분야에 새 지평을 연다는 자부심과 다른 농업 관련 신문보다 더 낫게 만들겠다는 오기로 버텼다.

1990년 드디어 한국농어민신문이 탄생한다. 농어민후계자(현 농업경영인) 조직이 구성돼 거기서 5억원이 모아졌고, 연구원의 조직과 시설 그동안의 신문발행 경험 등을 5억원으로 계산해서 자본금 10억원의 한국농어민신문사가 설립됐다. 산학협동이면서 농어민이 발행 주체로 참가하는 세계 최초의 신문이 나온 것이다.

재정이 확보되고 체계가 갖춰지면서 신문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비판을 하면서도 항상 대안을 제시했다. 현장에 농어민후계자 조직이 있었고, 연구원의 교수 등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도 자료를 베끼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무조건 단신 처리였다. 반드시 가공 처리해야 했고, 자료 자체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해야 했다. 보도 자료를 분석하고 추가 취재를 통한 특종도 터졌다. 기자들은 무조건 현장으로 나갔고, 오후엔 귀사해서 기자작성에 몰두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시기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신문에 실리는 농어업 관련 기사 한줄 한줄은 큰 반향을 불렀다. 기사가 나가면 현장에선 즉각 반응이 왔고, 농업정책이 기사를 반영했다. 원고지 1장 분량의 가십(당시 사발통문)거리에도 전화가 올 정도였다. 신문이 적었고 현재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대상황도 반영된 결과였으리라.

신문 마감시간이면 기사를 확인하고 광고를 챙겨야 하는 등 편집국은 전쟁터였다. 정부 관련기관, 기업체 등 홍보실 관계자들의 방문도 줄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비판기사를 빼달라거나 비판의 강도를 낮춰달라는 등의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언론중재위원회의 단골손님이었다. 자부심도 컸지만, 책임도 뒤따랐다. 특히 편집국장의 역할은 막중했다. 그 직책을 맡던 5년여동안 그만큼 스트레스가 쌓여 갔고, 건강에 이상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떴고, 신문사도 사직했다.

청춘을 다 보내면서 기자부터 시작해서 한국농어민신문에서의 20여년간 생활은 60대에 접어든 지금 생각에도 인생의 황금기였다. 이제 신문이 역사적인 지령 3000호를 맞는다고 한다. 비록 몸은 떠났지만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전국의 농어민은 물론 관련 기관·단체들에게 꼭 필요한 신문으로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하신 여러 선배님과 동료, 후배기자, 그리고 신문사를 거쳐 갔거나 현재 근무중인 모든 임직원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특히 구독자 여러분들에게 앞으로도 변함없는 관심과 채찍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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