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창립 이후 1989년 무주에서 열린 제1회 전국농어민후계자 수련대회 장면. 1만여명이 운집하면서 한농연이 농정 전면에 나서는 시발점을 알렸다.

농업·농촌 현장 주축…“농민 세상 만들자” 농정개혁 선두에

이번으로 지령 3000호를 맞는 한국농어민신문에는 항상 ‘농민이 100%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농업분야 전문언론’이라는 소개가 따른다. 주주농민들은 농업경영인(과거 농어민후계자)들로 농업·농촌현장에서 영농활동 뿐만 아니라 농정개혁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지난 해 말을 기준으로 전국의 농업경영인은 약 14만명. 1981년 첫 농업경영인(당시 농어민후계자)으로 1945명이 선정된 후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 왔다. 이에 지령 3000호를 맞아 현장 농업의 주축으로 자리 잡고 있는 농업경영인제도의 역사와 그들의 농정활동을 되짚어 본다.


급격한 산업화에 탈농 심화
위기 직면한 농업 살릴 대안으로
1981년 후계자 육성 본격화
작년 말 기준 14만명으로 성장

무주서 첫 전후협전국대회
1만여명 참여 ‘농정 전면으로’
UR개방 반대 등 정부와 대립 속
한국농어민신문 창간 힘모아
조직력 더 탄탄하게


▲농어민후계자 육성 본격화=농어민후계자제도가 도입된 배경은 현재의 농업·농촌이 처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후 국가재건사업이 시행되면서 정부가 공업과 수출중심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추진함에 따라 급속히 산업화가 진전됐고, 산업인력으로 농업·농촌의 인구가 급속히 빠져나가면서 농업도 위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된 1965년부터 1980년까지 농가인구변화와 농촌인구의 노령화 현상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1965년 1581만2000명이던 농가인구는 1980년 1083만명까지 감소했다. 연평균 33만명이 ‘이촌향도’한 것으로, 20세에서 39세 미만의 청년농업인 인구도 34%인 370만명까지 감소했었다. 현 시점에서 보면 ‘그래도 많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후계농업인력육성의 심각한 고민거리로 작용했다. 특히 현재와 같이 농업기계화율이 높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젊은 노동력의 도시유출은 심각한 농업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 우루과이라운드 핵심쟁점 사항 중 하나였던 쌀시장개방에 맞서 각 도별로 농어민후계자들이 단식에 돌입했다. 사진은 전남도연합회의 단식투쟁 장면.


▲농업인후계자육성기금으로 첫발=농어민후계자육성의 핵심은 ‘지원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였다. 1980년 11월 제정된 ‘농어민후계자육성기금법’에 따라 당시 재무부가 운영·관리하고 있던 기부재산 395억원 전액을 인수받아 농업인후계자육성기금에 전입하게 됐고, 추가로 정부에서 100억원, 축산진흥기금에서 700억원을 출연받았다. 이후 기금운용수익금들을 포함해 1983년 말까지 총 1477억원의 자금이 확보됐다.

당초 기금은 운용수익금만을 사용해 농어민후계자 육성에 사용하도록 했었다. 하지만 1983년 정기국회에서 복지농어촌건설을 위한 새마을청소년회원을 조속히 농어민후계자로 육성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농어민후계자육성기금법을 개정해 기금의 원금도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다음해인 1984년부터는 육성사업이 확대실시 됐고, 소요된 기금은 타재원에서 추가조성하기로 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5만여명의 농어민후계자가 선정됐고, 기금도 1987년 기준 2417억원이 조성됐다.
 

▲ 쇠고기 시장 개방에 맞서 집회를 열고 있는 한농연 회원들. UR협상에서 농축산물 분야에 대한 비교역적 기능(NTC)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1987년 12월, 전후협 출항=‘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가 발족한 것은 1987년 말의 일이었다. 1983년에 조직된 경남도연합회가 서울에서 유통사업을 추진하면서 사회표면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충북 영동출신의 후계자들이 4-H활동의 연장선 상에서 유통사업을 시작하면서 서울에서의 활동상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1987년은 민주화의 바람이 거셌던 시기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작과 이한열 최루탄 치사 사건 등이 터지면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6월 항쟁으로 폭발했고 사실상 군사정권이 마무리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농어민후계자들도 연합조직 추진에 나섰다. 10월 24일 농어민후계자 직능별 대표연석회의를 개최해 조직결성의 추진방향을 결정하고, 이어 11월 6일 2차 발기인대회·11월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 창립발기인총회에 이어 1987년 12월 9일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열게 된다. 이후 이듬해인 1988년 제주도를 제외한 도 단위 협의회가 모두 구성되면서 명실상부한 전국조직을 결성하게 됐다.

하지만 발족 후 전후협은 조직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적잖은 압박을 받았다. 정부의 육성정책이 탄생의 배경이었지만 전후협은 조직의 정체성을 ‘농정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으로 잡고, ‘농정에 관련된 각 기관들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고 정부가 농민들의 생존권과 농업살리기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농정활동을 적극 개진했다.
 

▲ 농정활동의 주역으로 나서게 된 한농연은 지자체장과 의원을 배출하면서 농정활동을 현장에서 의회로 넓혀나가고 있다. 사진은 1998년에 열린 한농연지방의원 당선자 축하연.


▲참여 인원 1만명, 기념비적 기록=그 시작은 제1회 전후협 대회였다. 전후협 창립 후 2년 후인 1989년에 열린 제1회 전후협 대회가 치러진 곳은 무주. 이전 관에서 주도하던 대회는 있었지만 후계자들이 직접 진행한 전국대회는 무주대회가 처음이었다. 역사적인 제1회 대회에 참여한 인원은 주최 측 추산 1만여명. 지금도 무주대회는 농어민후계자들이 농정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기념비적인 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무주대회 이후 1990년부터 정부가 농어민후계자육성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히면서 전후협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에 대응해 전후협은 ‘후계자육성기금법 폐지반대운동’에 나서는 한편, 국회 청원서를 준비하는 등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이처럼 농어민후계자의 힘이 더해갈수록 정부의 대응도 강해진 것. 급기야 중앙정부가 추진하던 농어민후계자육성사업을 산하기관이 농촌진흥청으로 이관하면서 반목은 더욱 커졌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한국농어민후계자신문(현 한국농어민신문)이고, 신문사 설립을 위해 자본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전후협의 조직력은 더욱 굳건해졌다.

1990년도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우루과이라운드협상(UR)을 통해 농산물시장개방을 진행하던 시기였다. 이에 전후협은 제 2차 전국대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했다. 소비자들과 함께 수입개방의 국난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배경이었다.

하지만 8월 18일로 정해진 전국대회 날에 임박해서도 정부가 대회장소를 내주지 않으면서 당초 대회장소로 요구했던 서울이 아닌 성환으로 변경됐고, 폭우까지 내리면서 행사가 하루 만에 중단되면서 성난 농민들은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기 시작했다. UR협상을 반대하면서 당시 집행부는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그해 늦가을 제네바에서는 이경해 열사가 할복을 기도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경해 열사의 뜻 이어받아
명실상부 농업계 최대조직…농민권익 보호 앞장

▲ 제2대 회장을 역임한 이경해 열사는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WTO Kills Farmers’를 외치며 농업을 위해 목숨도 바쳤다.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는 1991년 한국농어민후계자중앙연합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같은 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광역의원 4인과 기초의원 47인을 배출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어 1997년, 현재의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한농연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정당초청 농어촌공약토론회를 여는 한편,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도 대선후보자가 참석하는 대선후보자초청 농어촌공약토론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면서 명실상부한 농업계의 최대중심조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주요 농정운동에도 예외는 아니다. 1988년 농축산물수입저지 100만인 운동을 시작으로 1993년 쌀 및 기초농산물 수입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 주도, 1994넌 쌀 생산비 보장과 WTO비준반대를 위한 전국농민대회 개최, 1996년 쌀값 보장·의료보험통합촉구를 위한 전국대회를 열었다.
특히 1999년과 2000년 사이에 진행된 농가부채대책법 제정을 위한 1000만인 서명운동 및 입법청원, 2000년 마사회 환원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통해 농가부채대책법과 마사회 농림부 환원을 이끌어 냈고, 2001년 불길같이 일어난 전국단위 협동조합개혁운동 등을 주도하면서 협동조합 개혁의 주축에 서기도 했다.

이진우 기자 leejw@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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