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윤 화천현장귀농학교 교장

가해자들의 진심어린 반성과
피해자들의 용서가 만나
좀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길


중학교 시절 괜히 나를 따돌리거나 은연중에 괴롭힌 친구들이 몇 있다. 여름 하복을 처음 입고 간 날 내 의자에 일부러 껌을 붙여 놓은 친구들이기도 하다. 재작년인가 중학교 동창회에서 그 친구들 중 하나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친구 얘기는 내가 자기 집보다 부자였고, 아버님이 면서기라 농사짓는 자기들보다 더 편하게 살아왔고 덕분에 선생들에게도 좋은 대접 받은 거 아니냐는 거였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피해자라는 말이었다. 시골 동네에서도 내내 셋방살이를 전전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간신히 우리 집을 샀던 얘기나, 그 시절 면서기 월급 대신에 보리쌀 누른 것과 쌀을 섞은 것을 받아와서 질리도록 먹은 얘기 등은 하나마나였다. 이렇게 피해자와 가해자는 기억 속에서 서로 섞여 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내게도 좀 가슴 아픈 일이 있다. 30여 년 전 폭행사건에 대한 내 언급이 당시 피해자였던 친구에게는 상처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나는 피해 자체보다도 그 이후 가해자의 사과나 용서구함이 없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안고 있는 피해자의 상황이 더 가슴이 아팠다. 그 시절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가해와 방관을 돌아보면서 내 주제에 가해자를 욕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온 표현인데, 이것이 또 피해자에게 가해를 한 격이 되었으니 미안하고 미안하다.

한 사건이 벌어진 그 시점에는 당연히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시대를 돌아보면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나는 피해자였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나는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눈감고 지나친 방관자였다.

품성이 잘못되었다고, 자기 가족과 자기 삶에만 눈을 돌리는 기회주의자라고, 겁쟁이라고, 선배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술잔으로 맞았을 때 나는 피해자였다. 나 같은 회색분자에게 동아리를 맡길 수 없다며 동아리 회장을 하지 말라는 선배들의 경고를 들을 때도 나는 피해자였다.
하지만 내가 선배가 되어 운동하는 동아리에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온 후배를 욕하고 내쳤을 때, 의식도 없이 풍물 가락에만 빠진 날라리 자식이라고 후배들을 꾸짖었을 때의 나는 가해자였다. 최루탄 쏟아지는 대운동장 건너편 당구장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 과 동기들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닭장차에서 두드려 맞고 풀려난 무용담을 의기양양 떠들던 나는 가해자였다. 그리고 기독교 써클이 중심이 되어 통일교의 원리연구회를 학생회관에서 강제로 쫓아내는 폭력의 현장에서 나는 가해와 피해의 현장을 지켜본 방관자였다. 그러니 그 시대 전체를 보자면 나는 가해자이기도 피해자이기도 방관자이기도 하다.

노동운동의 분신 현장에 바로 옆자리를 지켰던 형이 있었다. 그 당시의 충격으로 정신적인 장애를 겪었는데 술에 취하면 함께 한 후배들을 폭행했다. 맞은 후배들은 흥분하고 열 받아 했고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 모든 것이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또 한 선배는 여리고 참 좋은 형이었는데 해병대 갔다 온 이후로 술만 마시면 후배들을 팼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사실이 부끄러워 사람을 피해 다니고, 술 마시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됐다. 졸업 후 동문회에서 그 형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 형들이 가해자이긴 하지만 그 형들도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였으니 그 형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 당시 그 형들에게 맞은 피해자가 오늘 내게 왜 가해자인 형들을 두둔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나는 그 형과 싸워서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막지도 못했고, 오히려 그 형들과의 자리를 피해 다녔던 방관자였으니까.

주먹으로 패야만 폭력은 아니다. 다수와 다른 소수파라고 밀어내고, 후배들과 만나지도 못하게 한 것도 폭력이다. 반대로 내 생각만 옳다고 세력 확장에만 기를 쓰던 소수파의 행동도 폭력이다. 후배들을, 일반 학우들을 의식화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행동한 것도 폭력이다. 그런데 사람의 기억은 늘 자기가 유리한 데로만 가는 법이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의식만 있지 내가 가해자였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피해자로서는 절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겠지만 내가 가해자이기도 하고 방관자이기도 하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동생은 내가 자기 대학원 학비를 한 번 내 준 걸 제수씨 앞에서 자랑했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서울의 사립대학을 가는 바람에 우리 가족들이 받은 그 가난과 고난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뿐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 상처가 있어서 오늘의 내가 그나마 사람답게 살고 있다. 부디 가해자들의 진심어린 반성과 피해자들의 용서가 만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상처를 딛고 성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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