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지 45일 만에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항복했다. 이후 전쟁 후유증으로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고 청나라 군대는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여성들을 끌고 갔다. 이른 바 속가(贖價), 즉 몸값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끌려간 사람들이 대부분 빈민이라 속가를 내고 찾아올 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간혹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되돌아온 환향녀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쫓겨나 조선의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 뒤로 화냥년이란 욕이 생겼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것은 나라였지만 손가락질은 힘도, 빽도,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던 여자들의 몫이었다.

<82년생 김지영>씨는 친절한 웃음을 보인 대가로 성폭행을 당할 뻔했고 과거에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이유로 ‘남이 씹다 버린 껌’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김지영은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회사에서, 하다못해 학교에서까지 성폭행과 성폭력에 시달린다. 억울해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너의 옷차림이, 너의 행동이 조신하지 못해서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남 보기 창피하다며 철저히 숨겨지기까지 한다.

지난해 출판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이러한 이유로 많은 여성들의 공감과 찬사를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소설은 여성을 바라보는, 여성을 대하는 우리의 자화상이었다.

미투(me too- 나도 당했어) 운동의 시작은 지난해 10월 미국 헐리우드에서였다. 유명한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사건으로 시작된 미투 열풍은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투 운동 소식이 들리자마자 대기업들의 사내 성폭행 사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한국 문단의 여성 작가에 이어 법조계까지 시끄럽다. 이제 더 이상 여성들은 숨지 않는다. 아니 숨을 필요가 없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 중요하다. 남성이 가해자요 여성이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생각에서 벗어나야한다. 이런 발상이 힘들게 용기를 낸 피해 여성들에게 새로운 벽을 만들고 그들의 진정성을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을 묵인하거나 조장해온 조직문화를 뿌리째 흔들고 바꾸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그래야 모든 개인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인격적인 사회가 조성된다.

허성환/농협구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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