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경시하는 선진국은 없어…EU, 가족농중심 경자유전원칙 확고"

 

송재일 명지대 법학과 교수는 빨간 색 표지의 두터운 사전, ‘프랑스 농수산법전’을 들고 있었다. 농업의 가치를 중시하는 프랑스가 농업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법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프랑스 농수산법전의 정의에 따르면 농업이란 “생물의 라이프-사이클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모든 인간의 활동”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농업을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하는 1차 산업으로 국한하지만, 농업을 중시하고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다른 나라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2차 대전때 기아공포 겪은 후
식량주권 중요성 깊이 인식
헌법에 농업관련 조항 비중 높아

우리도 농업가치 헌법반영 마땅
'경자유전' 현행 조항 강화
농업소득 보전 등도 명시해야


“혹자들은 농업을 일개 산업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고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생존, 의식주, 경제 사회 문화와 직결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핵심이 되는 산업입니다.” 송 교수는 “농업을 중시하고 농업과 관련된 헌법, 법률 등 법제를 잘 갖춘 나라는 선진국의 국격을 누리고 있다”며 “농업을 경시하는 나라는 선진국이라 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오늘날 민주공화정을 표방하는 세계 모든 나라의 헌법에 영향을 주고 있는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을 들어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해 설명했다.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공동이익, 공공질서, 공공 필요성이 중요하게 언급되고, 이 공공성이 우리 헌법에는 국가안보, 질서 유지, 공공복리로 구체화되는데, 농업은 경제와 산업에서 중요한 공공복리와 국가안보를 담당하고 있는 만큼 헌법에 농업의 국가안보와 공익적 기능을 반영해야 합니다.” 그는 “유럽이든, 미국이든, 선진국들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균형을 달성하려 한다”며 “어느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이고, 한국 농업은 늘 희생돼온 만큼 이제 헌법에 농업의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유럽의 국가들은 2차 대전을 계기로 기아에 대한 공포를 체험한 이후 식량안보, 식량주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농업을 중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2차 대전은 기아와의 전쟁이었죠. 당시 나찌는 기아(굶주림)를 통한 공포의 극대화, 식량 공급의 인종 간 차등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기아를 겪어본 유럽에서 식량주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농업의 국가안보 기능을 중시하는 성향은 일본에서 식료농업농촌기본법을 통해 식량자급률 명문화로 나타나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식량안보, 식량주권이란 개념으로 강조된다는 것이다. 

스위스를 비롯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터키 등 남부유럽 국가들은 헌법에서 농업조항 비중이 높다. 이들 국가는 농업의 가치를 반영한 조항과 함께, 상시적인 농지개혁 수준의 경자유전 원칙으로 가족농(가족법인)을 지원하는 농업구조개선을 지향하고, 협동조합 장려, 농업회의소를 통한 농정참여를 명시하고 있다. “스위스의 경우 식량안보 만큼 중요한 고민이 농업을 통한 지방분권으로 헌법에 반영돼 있고, 다원적 기능에 대한 보상으로서 직불이 담겨 있습니다.” 또 스위스 못지않게 농업을 강조한 포르투갈 헌법에는 가족농 단위의 중소규모 가족농장의 규모화, 협동조합 참여를 지원하는 반면 초대형 사유지는 금지하고, 농업정책 입안과정에서 농민과 농촌노동자들의 참여를 그들의 대변기관을 통해 보장한다고 규정돼 있다. 토지 사유에 대한 의무와 제한, 경자유전 원칙은 이탈리아, 터키 헌법에서도 확인된다.  

송 교수는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우리가 잘 아는 나라의 사례는 왜 빠져있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이 나라들은 실행 가능할 정도로 구체적인 농업기본법을 갖추고, 또 개별 법률로 세심하게 농업육성을 위한 원칙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유럽연합(EU)에 속하는 나라들은 EU의 공동농업정책(CAP) 자체가 단순한 정책이 아니라 바로 적용되는 ‘농업헌법’의 지위에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도 헌법에 농업의 국가안보 기능과 다원적 가치를 반영하고 지속적인 농지개혁과 경자유전 달성을 통해 가족농을 육성하며, 농민의 협동조합을 세계적인 것으로 키워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게 송 교수의 생각이다. 그가 제시하는 농업분야 개헌방향은 ‘경자유전의 원칙을 달성하도록 노력’하는 현행 조항을 ‘경자유전의 원칙을 달성하도록 하며’로 강화하고, 농업의 다원적 기능, 공익적 기능, 안보기능을 명시하는 내용이다. 또한 농업이 다원적 기능을 완수할 수 있도록 직접지불의 방법으로 농업소득을 보전하고, 협동조합과 농업회의소를 지원하는 방향이다. 송 교수는 농협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한 바 있고, 민법 전공으로 농지법을 비롯한 농업법, 협동조합법에도 정통하다.

이상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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