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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을 넘어
   
 

박기윤 화천현장귀농학교 교장

영화 1987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그 시절 치열하게 살았던 많은 분들이 추억을 되새기며 눈물을 훔친 모양이다. 촛불혁명에 이은 정권교체와 현재 진행 중인 적폐청산의 과정이 있기에 더욱 의미 있는 영화가 되었다. 80년 광주를 그린 ‘택시운전사’에 이어 현대사의 질곡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픽션 아닌 픽션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아직 두 영화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세월의 힘으로 간신히 치유되어 가던 상처를 다시 들쑤시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85년 대학 1학년의 나에게 80년 광주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내 삶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었다. 처음 광주의 참상을 자료집으로 보고 난 4월의 어느 날 저녁 이후 나는 매번 술만 취하면 광주학살 현장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환상에 빠졌다. 그들을 피해 이 골목 저 골목 도망 다니다 술이 깨고 정신이 들면 참담한 마음으로 간신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버릇이 없어진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10년은 더 지나서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아침마다 책상 위의 태극기를 보며 나라와 겨레를 위해 뜻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맹세해 온 스무 살 시골 촌놈이 제 나라 국민들을 탱크와 총칼로 학살을 하는 국가라는 실체를 마주하고는 존재의 기반까지 흔들려 버린 것이다.

스무살 촌놈의 삶을 뒤흔든 현대사

그 시절 나를 표현하는 감정은 한 마디로 ‘두려움’ 이었다.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고, 스크럼을 짜고, 후배들을 독려하고 하는 모든 행동의 바닥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정당하지 못한 사회 구조와 국가에 대한 ‘분노와 용기’가 나를 일으키길 간절히 바랐지만 아쉽게도 나는 늘 무서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직면하고 인정하기 보다는 나의 한심하고 약한 면을 선배나 동기, 후배들이 볼까봐 위장하고 피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렇게 1987년을 맞았고 치열하게 싸우지도 손을 놓지도 못한 채 시대의 물결에 떠밀리듯 지나왔다. 그러고 나니 그렇게 피하고 싶던 ‘두려움’ 이라는 감정 대신에 ‘죄의식’ 과 ‘수치심’이 자리를 잡았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 시대를 처절하게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말이다. 세상은 변했고 국민들에게 직접 폭력을 자행하던 국가도 바뀌었지만 나라는 인간은 여전히 내면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얼마 전 후배가 SNS에 대학시절 아는 지인에게 폭력을 당했던 경험을 올렸고 많은 사람들이 당시 대학에서의 폭력적 문화를 고발하는 댓글을 달았다. 국가 폭력에 대항하는 운동을 하던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폭력적이고 가부장적 문화의 역설보다도 나는 30여년이 지났는데도 남아있는 그 상처에 마음이 더 아팠다. 또한 그 가해자 또한 당시의 나처럼 내면의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을 까 하는 연민도 들었다. 그 시절 국가와 사회 등 거대 담론에 쏟는 노력의 일부만이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관심을 돌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내 삶을 바꿔야

지난 대선이후 87년 체제의 완성 이니 종말이니 하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아울러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는 소리들도 높다. 물론 변화한 시대를 담을 수 있는 헌법이나 선거법 개정 등 시스템의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제도개혁이 만능일 수는 없다. 결국은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친환경인증 방식을 농약, 화학비료 등의 사후검출방식에서 과정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바꾸기만 하면 문제가 해소가 될까? 생태농업에 대한 철학이 없이 돈만 바라보고 친환경농업을 하는 농민의 경우 밤에 몰래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지는 않을까? 그럴 경우 이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는 친환경농업은 완전히 망하는 건 아닐까? 농민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소수의 경쟁력 있는 대농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소농들은 환경보전과 생태적 건강성을 지키면서 농업 농촌을 지켜나갈까? 서류상으로는 농민의 자격을 유지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며 돈만 빼먹는 사례가 비일비재 할 거라는 것은 기우일까?

구조적이고 제도적 변화는 적응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것을 잊고 단기간에 근본적인 혁신을 얻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우리는 4.19 와 6.10에 이어 지난 촛불혁명까지 세상을 바꾸는 큰 흐름을 이루어 낸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희생되고 상처를 받은 수많은 개인들을 위로하고 치유해 온 경험은 일천하다. 세상은 변화시켰지만 나는 여전히 불행하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왜 변화시켰는가?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 보듬고 가길

한사람의 상처가 치유되는 데도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 십 년 까지 걸리는데 구조적인 변화, 시스템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고, 시행착오를 견뎌내고,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위한 동기부여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는 행위를 수반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변화를 견인하는 주체인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니 결국 혁명은 우리 일상에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변화해야 앙샹레짐이 바뀌는 거지 제도만 시스템만 바꾸는 것은 늘 미완의 혁명일 뿐이다.

지난 촛불혁명은 비폭력 평화운동 이었다. 참가자 모두가 소외받지 않는 그래서 상처받지 않은 큰 잔치판이었다. 저항운동이 모든 세대의 즐거운 놀이판이었던 그곳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그대여 아무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함께 노래합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새로운 꿈을 꾸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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