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프롤로그/왜 농업의 다원적 가치인가

▲ 청산도 구들장 논, 제주 밭담, 하동 전통차밭은 독창적인 농업문화, 생태환경, 수려한 경관이 어우러져 FAO가 미래세대에 넘겨줄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한 곳이다. 이는 농업의 다원적, 공익적 기능을 설명하는 좋은 사례다.


경제성장 지상주의에 매여
미래세대에 넘겨야 할
농업·농촌의 가치 외면 심각

농업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국가적 책무 확립하려면
최상위 규범 헌법에 명문화해야


청산도는 물이 부족하고 돌이 많은 척박한 땅이었다. 16세기 말부터 완도뿐 아니라 해남, 강진, 장흥 등 외지 사람들이 섬에 이주해 와 인구가 증가하자 식량 생산을 위한 논, 밭이 더 필요하게 됐다. 그래서 가파른 골짜기까지 돌을 쌓아 계단식으로 논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구들장 논’이다. 해안-주거지-구들장논-산림으로 이어지는 청산도의 농촌경관은 하나의 그림이다.


제주도는 우리에게 신비한 화산섬이지만, 그 땅을 일구며 살아온 제주 사람들에겐 가혹한 조건이었다. 흙을 조금만 걷어내면 돌 천지이고, 거센 태평양의 바람과 비에 노출된 땅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그들은 돌을 쌓아 밭담을 만들었다.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 밭담은 바람을 달래고 어른다. 밭담은 토지경계를 표시하고, 농작물과 토양을 보호하는 기능을 넘어 우리 모두의 유산이 됐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은 1200년 전 국내 최초로 중국에서 차가 들어와 재배된 곳이다. 쌍계사와 같은 사찰과 스님들이 많아 사찰에서 사용하는 차를 공급하기 위해 인근에 차밭이 확대됐다. 화개면은 지리산 남쪽 산간지역으로 해는 잘 들지만 경사지가 많아 우량농지는 적은데, 비탈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는 차나무는 안성맞춤이었다. 산자락에 순응해 자연스런 화개차밭은 가장 한국적인 풍광을 보여준다.
 

▲ 청산도 구들장논, 하동야생차밭


농업을 통해 자연과 사람이 조화된 이들 지역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명승지다. 2014년 4월 ‘청산도 구들장 논’과 ‘제주 밭담’이 처음으로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된데 이어 지난 11월 ‘화개지역 하동 전통차농업’이 3번째로 인정받았다.

유네스코(UNESCO)가 세계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지정, 보호한다면 농업분야에는 식량농업기구(FAO)가 지정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이 있다. 세계중요 농업유산은 FAO가 2002년부터 세계 각지의 독창적인 농업문화를 보전, 미래에 넘겨주기 위해 운영하는 제도이다. 지금까지 중국 운남성의 ‘하니족 계단식 논’ 모로코의 ‘아틀라스산맥 오아시스 시스템’ 페루의 ‘안데스농업 시스템’ 17개국 38개 농업유산이 등록돼 있다.

FAO가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전 세계의 독창적인 농업문화, 인류 진화시스템 및 생물 다양성을 보전해 지속가능한 농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이나 공익적 가치와 맥락을 같이 한다.

농업은 국민의 먹거리를 공급하는 본원적 기능을 포함, 환경생태보전, 전통문화 계승, 농촌경관 유지, 농촌사회 활력유지, 인구분산과 국토의 균형발전 등 수많은 다원적 기능을 수행한다. 다원적 기능은 시장가격으로 매겨지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없다. 따라서 농업·농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다원적 기능을 발휘하려면 정책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역대 정부가 추진해 온 경제성장 지상주의가 한국사회의 지배이념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농업의 공익적 가치는 외면돼 왔다. 시장개방과 농업 희생을 바탕으로 수출대기업을 살려온 성장정책, 건설토목 중심의 농촌개발, 투입재 중심의 생산주의 농정으로 농업의 가치는 소멸돼 가고 있다.

다행히 한국사회의 격변 속에 헌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면서 농업의 가치를 헌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에 농업 조항을 신설, 국가 농업정책의 목표와 과제를 명확히 하고 농업의 역할과 기능, 이에 대한 국가적 책무를 확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적인 개방농정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국민농업’이 되려면 식량안보, 식량주권, 다원적 기능을 헌법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임정빈 서울대 교수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책무를 국가 법체계의 최상위 규범인 헌법에 명문화하는 것은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기여하고, 국가기관이 농업의 다원적 기능 유지를 위한 구체적 입법과 정책을 수립·시행하기 위한 강력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농업유산은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설명하는 현실의 교과서다. UN FAO가 이 제도를 운영하는 목적은 그 선정기준에서 드러나듯 지속가능한 농업과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다. 헌법에 농업의 다원적 가치와 이를 위한 국가의 책무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농민뿐만이 아니라 국민 전체, 나아가 미래를 위한 공익을 증대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농업의 다원적 가치를 수치화한다면‘86조2907억원’
임업·어업까지 합치면 166조


2012년 양승룡 고려대 교수의 연구 ‘농업·농촌의 가치 평가’에 따르면 농업의 다원적 가치는 86조2907억 원, 임업 75조6913억 원, 어업(갯벌) 3조7130억 원으로 농림어업 전체의 다원적 가치는 총 165조6950억 원(2009년 기준 불변가치)이다. 농업의 다원적 가치를 세부적으로 보면 환경보전 79조6178억원, 문화경관 3조6357억 원, 식량안보 2조550억원, 농촌 활력화 9822억원이다.

환경보전 가치를 구성요소별로 보면, 논은 장마철 강수량을 논둑에 저장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를 댐 건설비와 유지비로 대체하면 논농사 45조8605억 원, 밭농사 7조4693억 원을 합쳐 53조3299억 원의 ‘홍수조절가치’가 있다. 농경지에 공급되는 물이 지하수 자원이 되는 ‘지하수 함양가치’는 1조8847억원이다. 농작물 재배지는 비재배지에 비해 온도변화가 적고 혹한 및 혹서 방지효과가 있는데 이를 ‘기후순화 가치’로 계산하면 14조6461억원이다. 작물이 광합성하면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대기정화’는 5조162억 원의 가치가 있고, 집중강우로부터 토양 유실을 막는 ‘토양유실저감가치’는 1조5938억원으로 추정된다. 이외 가축분을 소화하는 기능, 수질 정화기능이 있다.

문화·경관가치로 농업은 도시민들에게 휴식공간과 함께 어린이들의 정서함양 등 자연적, 문화적 심미적 기능을 제공하는 ‘휴양처 제공’의 기능을 하는데, 이 가치는 1조4188억원이다. 또 농업은 녹색 경관을 형성하면서 오랜 역사 속에 축적된 독자적인 자연, 문화, 사회환경으로 ‘경관가치’를 갖고 있으며, 이는 2조2170억원으로 평가된다.

한편 이 연구는 농생명산업으로서 농림수산물생산업, 투입재산업, 식품가공업, 외식산업, 관련 유통업, 비식용가공산업, 어메니티산업 등을 합친 농업의 산업적 가치를 85조8116억원으로 조사했다. 이 둘을 합치면 농생명산업의 총가치는 251조5066억원에 달한다.


|양승룡 고려대 교수
“헌법서 농업조항 독립…국가 책임성 높여야”


식량안보·공익적 기능 추가
경자유전·소작제 금지는 유지

농어촌상생기금 유명무실
‘무역이득공유제’ 시행 필요

“예산 편성 등 기존 추세대로라면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반영한 직불제 확대라는 농정의 대전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떨어집니다. 헌법에 농업의 공익적 기능 등을 반영해서 상징성과 힘을 받는 게 중요합니다.”

양승룡 고려대 교수는 이번 개헌에서 범 농업계의 협력으로 헌법에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 11월부터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업분야 개헌방향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구성한 ‘농업농촌 개헌 대응 TF’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2012년 1월 ‘농업·농촌의 가치 평가’ 연구를 통해 환경보전, 경관문화, 농촌 활력 제고, 식량안보 등 농업의 다원적 가치를 166조원으로 조사한 바 있다.

양 교수는 “시장에서 쌀을 거래할 때 소비자들이 논 농업의 환경보전 기능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지 않는 것처럼 농업의 다원적 기능은 시장에서 외부효과와 공공재적 특성으로 인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외부효과란 경제 주체의 행위가 시장을 통하지 않고 대가 없이 다른 경제주체에 긍정 영향(외부경제)이나 부정 영향(외부불경제)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식량안보, 환경보전, 지역경제 발전, 문화 같은 농업의 다원적 기능은 공공재로서 시장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시장실패’가 나타나는 만큼, 국민들에게 이를 원활하게 공급하려면 국방이나 치안처럼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개정 헌법에는 “농업조항을 독립시켜 권위와 국가 책임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행 헌법에는 123조에 농업 조항이 지역경제, 중소기업 보호 육성 조항과 함께 규정돼 있는데, 새 헌법에는 농업조항을 독립시켜 식량안보와 공익적 기능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어렵다면 식량안보와 공익적 기능을 현 조항에 추가하고, 중소기업 보호와 농업이 연대하는 것도 현실적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또 양 교수는 농업가치 헌법규정은 국가적 지원의 근거가 되지만, 농민에게 의무와 규제가 따르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논리와 관련,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농업이 생산하는 외부효과는 긍정 효과인 외부경제, 부정 효과인 외부불경제 두 가지가 있는데, 외부경제인 다원적 기능을 활성화하고, 외부불경제는 가급적 줄이는 방향으로 생산과정을 재편하고, 농정 또한 그것에 맞춰 재편해 나가면 됩니다.”

그는 ‘경자유전의 원칙’과 ‘소작제도 금지’는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국가의 토지정책으로 인해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생산하는 기능이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한편 농어촌상생기금이 유명무실한 것과 관련, 양 교수는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서 무역이득공유제를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출기업, 식품산업, 수입업자, 소비자 등 FTA로 이득을 보는 모든 주체들이 피해부문에 보상한다면 당연히 정부 예산으로 무역이득공유제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상길 논설위원 leesg@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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