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농어촌여성문학 수필 부문 최우수 작품     


솥이 있던 자리
 

▲ 백계순

퇴근길이다. 마당에 들어서니 아침에 못 보던 물건이 눈에 띈다. 녹이 잔뜩 슬고 부뚜막에 걸치는 날개 한쪽이 떨어져 나간 가마솥이다. 고물도 보물이 된다며 남편이 어디서 얻어온 것일 거다. 세월이 묵은 솥은 제대로 앉아있지 못하고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자식 사 남매를 건사하느라 허리가 휘어진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의 하루는 솥과 함께 열렸다. 첫닭이 울면 까치발을 한 어머니가 안방 마루를 지나 부엌을 향한다. 식구들의 새벽잠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마음과 달리 ‘삐걱’ 정지문의 나무 빗장 소리는 새벽을 울린다. 할머니 옆에 잠들었던 나는 어머니의 움직임을 알아채고 눈을 비빈다. 동생에게 자리를 내주었지만 아직은 엄마의 젖무덤이 그리운 어린아이였다.

어머니는 발을 헛디딜 정도로 캄캄한 부엌에 들어서면서 30촉 알전구 하나로 어둠을 몰아낸다. 부엌살림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가마솥 삼 형제다. 왼쪽에서부터 가장 큰 밥솥, 국솥, 맨 끝에 있는 앙증맞은 꼬마 솥까지.

이 솥들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품이다. 밥을 잘해야 시집살이가 편할 것으로 생각한 친정아버지가 보낸 마음이었다. 밥맛을 좌우한다는 솥뚜껑 무게는 어른도 쉽게 들지 못할 정도로 묵직하다. 쉽게 뚜껑을 열 수 있도록 손잡이가 뚜껑 가운데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다. 어머니는 먼저 가벼운 행주질로 솥을 깨우고 국솥에 물을 데우는 것으로 식구들의 밥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혼자서 불을 밀어 넣으며 칼질을 하고 채소를 다듬는다. 손과 발을 적당히 사용하며 두 평 남짓한 부엌 안을 검객의 몸놀림처럼 날렵하게 움직인다. 나는 이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끔 불을 보러 나갈 때가 있었다.

불을 보기는 쉽지가 않다. 어머니는 혼자서도 불을 꺼트린 적이 없지만 나는 종종 환하던 아궁이를 캄캄하게 만들었다. 잘 타고 있는 나무를 까닭 없이 헤집어서 일거리를 얹었다. 어머니는 얼른 부지깽이를 들어 나무를 이리저리 공구고 바람구멍을 만든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불씨가 살아나 다시 아궁이 속이 환해졌다.

밥솥에 김이 오르면 뚜껑 손잡이를 행주로 감싸고 옆으로 쓱 밀었다. ‘차르르’ 거슬리지 않는 쇳소리, 뽀글뽀글 밥 끓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김이 뿌옇게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는 얼굴을 살짝 돌리고 쌀뜨물에 개어놓은 달걀 물을 스텐그릇에 담아 얼른 밥 위에 올렸다.

그때까지도 부지깽이 겉이 발갛도록 불장난을 하는 나에게 이제 나무를 그만 넣어도 된다며 타다 남은 나뭇가지를 주섬주섬 정리했다. 긴 나뭇가지는 밖으로 골라내고 남은 불씨로 뜸을 들였다. 밖으로 낸 나뭇가지는 살강 밑 단지의 물을 한 바가지 퍼서 휙 끼얹어 불씨를 죽였다. 치익, 비명을 지르며 발갛던 나무 끝이 까맣게 변했다. 이 과정 또한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가마솥은 조금만 소홀히 해도 녹이 슬었다. 어머니는 수시로 들기름을 두르고 세 개의 가마솥을 큰 것부터 차례로 닦았다. 밥을 할 때와는 다르게 시간을 잘게 쪼개며 안과 겉에 골고루 손길을 주었다. 어머니가 솥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식구들 힘이 밥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기름 먹여 반들반들해진 솥뚜껑에 30촉 불빛이 튀었다.

솥을 보면 어머니의 마음자리를 알 수 있었다. 어쩌다 앓아눕거나 아버지와의 사이가 삐걱거릴 때면 반들반들했던 솥뚜껑은 어머니의 낯빛처럼 거칠해졌다. 옹이진 어머니의 마음이 붉은 반점으로 솥뚜껑에 피어올랐다. 온기가 전해지던 부엌에 한 바람이 들락거렸다.

막냇동생이 초등학생이 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 어머니는 손에서 삽을 놓지 않았다. 식구들의 삼시 세끼를 챙기면서 논일을 했다. 할아버지가 계셨지만,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중풍으로 반신을 쓰지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논두렁에 흘린 땀방울만큼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이런 고단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끔 부엌 바닥에 앉아 생솔가지를 태울 뿐이었다.

생솔가지가 탈 때는 타닥타닥 솔잎 타는 소리와 함께 매운 연기를 내뿜었다. 어머니는 생솔가지 연기를 피우며 눈물을 닦았다. 의아해하는 딸 앞에서는 흰 앞치마를 끌어당겨 코를 한번 ‘팽’ 훔치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래도 불안을 떨칠 수 없었던 나는 통나무 사이로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어머니의 어깨도 가벼워지길 빌었다.

어머니의 삶에는 일찍부터 솥이 있었다. 어머니 나이 일곱에 엄마를 잃었다. 딸이 귀한 집안이라 일찍부터 부엌살림은 어머니의 차지였다. 그때부터 솥은 묵묵히 어머니를 품어주었다. 엄마가 그리울 때는 부엌 바닥에 앉아서 매운 연기를 핑계로 눈물을 쏟아냈다. 부지깽이로 부뚜막 장단에 맞춰 ‘섬마을 선생님’을 부르며 고단함을 견뎠다.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만 있었지 자상하게 딸을 챙기지 못했다. 고명딸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손에 물마를 날이 없었고 성년이 되자 바로 시집왔다.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 전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제일 큰 밥솥 안에다 촛불을 켰다. 목욕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조촐하지만, 오곡밥에 나물을 차려놓고 온 마음을 다해 손을 비볐다. 달을 향해 농사의 풍년과 식구들의 건강을 빌었다. 또 하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자식들만은 박복한 어미를 닮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도가 통한 것일까. 얼마 전 큰 동생네에 우리 사 남매가 다 모였다. 표정들이 밝았다. 다들 짝 맞춰서 그냥저냥 살아간다. 큰 부자는 없지만 밥은 먹고들 산다. 이 모두가 어머니의 밥심이고 기도 덕이 아닐까. 동생은 “누나는 엄마를 닮아간다” 했다. 맞는 말이다. 얼굴 모습뿐만 아니라 식구들 아침밥을 먹이려고 새벽부터 설치는 것 또한 닮았다.

달이 차오른다. 밤이슬을 묻히며 가마솥과 마주한다. 제 모습을 잃을 때까지 어느 집 아궁이에서 주인의 따뜻한 밥을 위해 한 몸 달구었을 몸뚱어리, 우리 사 남매를 위한 어머니의 마음만큼이나 깊고 무거워 보인다. 손을 뻗어 몸을 쓸어본다. 어머니의 자리에 늘 앉아있던 솥처럼 온기가 느껴진다. 어머니의 솥 밥이 그리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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