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기가 끝나면 산지에선 크고 작은 신음이 종종 새어 나온다. 작황이 안 좋은 품목은 모자라 걱정이고, 풍년이면 가격 하락과 재고 증가 등 ‘풍년의 역설’에 전전긍긍하는 이들이 농촌 현장 곳곳에 있다. 고단함 속 결실의 기쁨은 짧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공교롭게도 농정 당국의 이듬해 ‘예산 수확’이 이뤄지는 것도 이 때쯤이다.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심의, 확정하는 작업이 ‘여의도 산지’(국회)에서 해마다 ‘숙련된 농부들’(국회의원)에 맡겨 진행되고 있지만, 그 결실은 올해 역시 신통치 않다. 농식품 분야 예산만 놓고 보면 그렇다. 농식품 분야의 내년 예산안은 국회 본회의를 거쳐 총 14조4996억원으로 확정됐다. 당초 정부안 대비 56억원, 올해 대비 겨우 109억원(0.08%) 늘어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쌀 변동직불금 편성 예산 1조4900억원 중 4100억원을 예산 심의에서 감액해 이를 농업 예산으로 재편성한 부분을 성과라고 농정 당국은 말하고 있지만, 농업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예산 편성 시점보다 산지 쌀값이 회복돼 변동직불금 예산이 불용될 것으로 우려되는 최대 금액은 9000억원 정도. 이 중 4100억원을 살려냈다는 게 농림축산식품부의 얘기인데, 거꾸로 말하면 나머지 5000억원은 불용이 예상됨에도 예산 심의 과정에서 걸러지지 못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번 역시 기획재정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는 전언이다.

예산안의 법정 처리 기한(12월 2일)을 나흘 넘기며 6일 새벽 가까스로 통과된 농식품 분야 예산은 앞서 5일 본회의 개최를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까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여야 간사들만 참여한 ‘소소위’ 장막 속에 가려져 접근이 불가능했다. 변동직불금 감액 분을 농업 분야 예산으로 배정한다는 원칙 아래 감액 폭을 두고 국회 예결위 간사들과 기재부의 줄다리기가 진행 중이고, 이 결과에 따라 다른 농업 분야의 증액 규모가 정해질 것이란 말만 나돌았다.

정부 소식에 밝은 여당 관계자는 5일 오후 “농식품부는 불용이 예상되는 변동직불금 편성 예산을 가급적 많이 감액하는 것을 원하는 입장이지만 예산 당국이 이를 반대하고 있다”며 “감액 폭이 크면 그 금액을 다른 농업 분야 사업에 투입할 여지가 크고 사실상 증액 효과가 나타나는 것인 만큼 기재부가 꺼리고 있다”고 전했다. 예산 심의 중 감액은 국회의 고유한 영역이지만, 증액은 예산 당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농해수위 소속의 한 예결위 간사가 농식품부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기재부 관계자에게 요구했지만, 기재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한바탕 ‘언쟁’이 있었다는 말도 들렸다.

결국 불용 우려가 일찌감치 예견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변동직불금 예산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5000억원의 불용액을 감액하지 못한 채 ‘깜깜이’ 처리됐다. 가뜩이나 농식품 분야 예산이 매번 ‘불용 논란’에 휩싸일 때마다 기재부의 눈치가 따가웠는데, 이번에는 내년 예산을 써보기도 전에 불용 예산이 확정된 경우가 벌어졌다. 바람직한 예산 심의라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비단 농업계만의 생각일까. 과연 누구를 위한 ‘예산 심의’인지 이들을 대신해 다시 한번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고성진 농정팀 기자 kosj@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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