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윤 화천현장귀농학교 교장

며칠 전 비무장지대(DMZ) 평화문화제 행사에 참가하러 연변대학교 교수님을 비롯하여 중국동포들 네 분이 다녀갔다. 올해 5월 두만강 일대 북중 국경 지대를 답사 갔다가 만난 분들이다. 재미있는 건 이분들이 DMZ와 통일전망대 등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만주와 두만강일대를 다닐 때의 표정을 짓는 것이다. 남한 사람들이 백두산과 만주를 다니면서 안타까워하고 숙연해하던 그 모습을 보고 별 감흥 없이 심드렁하던 사람들이 정작 분단의 현장을 경험하고는 말을 잊고 가슴 저리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국경이야 있지만 원하면 언제든 넘어 다닐 수 있는 곳에 있다가 철책선 하나를 두고 오도 가도 못하는 현장을 보면서 비로소 분단과 단절의 실상을 체감한 것이리라. 어쨌든 만주, 남한, 북조선으로 사는 곳은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배달겨레라는 동질성 속에서 민족의 아픔을 절절이 느낀다.

분단의 세월에 갇힌 민족의 아픔

21세기 남한 사회에서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만주와 화천, 춘천에서 중국동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는 알게 모르게 민족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게 되고 또 그 용어에 대한 어색함에 놀라게 된다. 다문화사회라는 이름으로 민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구세대의 유물로 취급해 온 것은 아닌가? 미국이나 중국처럼 영토가 중심이 되고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이 섞여 살아가는 나라에서 다수파가 민족이나 인종을 이야기하는 것은 소수파에 대한 탄압과 나라를 분열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남북이 갈려 있고, 중국이나 일본과 민족문제를 갖고 있는 처지인 경우에는 다르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민족을 버린다면 남북이 통일을 할 아무런 당위도 없어지고, 간도문제나 재외동포 문제에서도 근거가 없어져 버린다. 현재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영토의 문제만으로 바라본다면 고구려도 발해도 전부 중국의 역사일 뿐 대한민국과는 관계가 없어져 버린다.

물론 그간의 파시스트 정권처럼 조국, 민족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내부의 비판세력을 억누르는 논리로 사용할 수도 있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수단으로 악용할 수도 있지만 근세 조선이 망한 후 식민지 피지배민족으로서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제국주의자들에게 장기간의 무장투쟁을 해 온 원동력도 민족의식 덕분이었던 것처럼 잘 활용하면 될 일이다. 쇄국 조선과는 다르게 활발한 대외활동을 통해 세계에 ‘코리아’ 라는 이름을 알렸고 수많은 인종과 민족들이 다양하게 교류하던 고려시대에 민족의식이 가장 크게 대두되었다는 점은 민족이 단순히 혈연관계의 집단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유대인들은 모계든 부계든 어느 한쪽이라도 핏줄이 조금이라도 섞였으면 다 유대인으로 인정한다고 들었다. 중국의 한족은 아예 정체성 자체가 없다. 그냥 자기들이 한족이라고 하니까 한족이지. 민족을 부정하는 논리로써 우리 민족이 수 천 번 이상 외적의 침입을 받아 피가 다 섞였는데 무슨 단일민족이니 한민족이니 하느냐는 얘기는, 우리를 침략했다는 이민족들이 실상은 거란, 여진, 몽골 등 우리와 혈연적으로 무관하지 않은 집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의 발상이거나, 늘 침략을 당하고만 살았다는 식민 자학사관이기도 하며, 또한 순혈주의 순종주의인데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세상에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 민족은 환웅할아버지의 개천 이후 단군할아버지의 조선을 시조로 보는 공통의 관념을 가지고 주로 동북아시아에 거주해 온 몽골리안이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이다. 이 민족 개념을 내부의 소수집단을 통제하고 차별의 근거로서 이용한다면 극우 독재의 논리가 되어버리지만, 남북 통일과 영토를 넘어선 공동경제권으로 확대시켜 나간다면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긍정의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다.

귀농인과 비슷한 새터민의 처지

학교 옆에 하나원이 있어서 재작년부터 수시로 교류하고 있다. 북한 이탈주민들이 먼저 당국의 조사를 마치게 되면 이곳에서 적응 교육을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분들의 농업 교육을 몇 년간 담당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북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작년부터는 하나원 교육생 뿐 아니라 남한에 온 지 여러 해 지난 새터민 분들에 대한 영농정착교육, 그러니까 귀농교육을 맡게 되면서 더더욱 남북문제,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열흘 남짓한 합숙교육을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우리 사회에서 북한 이탈주민, 즉 새터민들의 처지는 귀농귀촌자들의 그것과 참 비슷하다는 것이다.

새터민과 귀농자는 철저하게 이방인이며 소수자이다. 말은 통하고 생김새도 비슷하지만 정작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북한에서 남한 사회로 오거나, 도시에서 시골로 오거나 간에 원래 있던 사회와 문화적으로 너무 이질적이다 보니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이민을 갔다면 말이라도 안 통하니 그걸로 위안을 삼기라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둘 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현실을 피해 온 사람들이다. 돈, 건강, 인간관계의 문제 모두 귀농을 하면, 탈북을 하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실의 벽을 절실하게 느껴 몸과 마음이 아프다.

그러면서도 새터민과 귀농자는 우리 사회의 미래이다.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농업 농촌 인구와 고령화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갖는 것은 매년 늘어나는 귀농귀촌자들이다. 시골 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초등학교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새로 이주해 오시는 분들 덕분이다. 비록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을 버리지 못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고, 주민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적응해 나갈 것이다.

남북 농업교류시 중요 역할 기대

지난 정부 동안 개성공단을 포함한 모든 남북간의 교류는 허용되지 않았다. 소나무 재선충 공동방제, 남북 협업농장 등 농업과 산림분야에서도 모든 교류는 단절되었다. 다행히 정권이 바뀌었고, 비록 핵 위기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어 있긴 하지만 조만간 남북 교류는 다시 재개될 것이다. 통일을 대비한 식량정책, 식량 안보의 측면에서 북한 농업에 대한 기술지원, 종자나 비료, 농기계 지원 등 다양한 농업분야에서의 남북교류도 활성화될 건데 이럴 때 양쪽 체제를 다 경험해 본 새터민 귀농자들이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며 점점 더 중요성이 커질 것이다.

결혼 이주자들이나 농업 노동 이주자들에 대해서는 다문화사회라는 관점으로 사회적 배려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농촌 사회는 오히려 역차별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반면에 탈북하신 분들이나 중국 등에서 온 동포들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참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 개념을 잊고 살아도 좋은 세상이 온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 우리 체제 속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형제도 핏줄도 애써 무시하고 살아가는 건 아닌 지, 그래서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개념 자체를 지우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에 전입해 온 새터민이나 결혼 이민자 등 소수자들을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휴전선 너머의 북한과 만주,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도 식구로 받아들이는 통 큰 민족 개념을 형성해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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