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기 친환경농축수산 유통정보센터장·논설위원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고 신상옥 영화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로 ‘쌀’이란 영화가 있다. 1963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전북 무주구천동 산골짜기 농민들이 산을 뚫는 등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그토록 바라던 벼농사를 산골마을에서 일궈낸다는 내용이다. 쌀농사를 짓고자 하는 농민들의 염원과 고난의 과정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1960년대에는 쌀 한말이 1000원 정도 했다고 한다. 서울 강남지역 땅값이 3.3㎡에 1000~1300원 정도이었으니 그 당시 쌀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때부터 쌀은 물가 및 노동력의 기준이 될 정도로 매우 귀했다. 이렇다보니 옛 선조들은 쌀을 구입하는 것을 ‘쌀을 판다’고 했다. 어디 이뿐인가. 우리는 어릴 때부터 쌀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밥그릇에 한 알의 밥풀을 남기거나 흘려서도 안됐다. 밥풀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주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삶의 원천이자 생명줄로 여겼던 쌀이 지금은 흔하디흔한 식량, 애물단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지난 4년간 계속된 풍년에 쌀 생산량이 대폭 늘어난 반면 소비량은 줄면서 재고량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탓이다. 결국 쌀값은 곤두박질쳐 20년 전 가격대까지 내려갔다. 이렇다보니 농업생산액 최고자리도 내줬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조사한 2016년 농업생산액에서 돼지고기에 밀려 2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동안 단일 품목으로 최고를 유지했던 위상마저 흔들렸다. 올해도 가을 들녘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지만 농업인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일선 현장에서는 작황은 나쁘지 않은데 가격을 걱정하는 농업인들의 한숨만 들린다. ‘풍년의 역설’이 올해도 재연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물론 정부도 그동안 다양한 대책들을 내놓았다. 쌀값 폭락은 당장 농업인들의 소득 감소는 물론 부채 증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또 직불금 예산 증가는 국가재정에도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어서다. 다행히 단경기에 접어들면서 쌀값 회복 움직임이 감지된다. 최근 통계청 산지가격 조사치가 세 번 연속 가격상승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쌀 재고량이 전반적으로 감소하고 올 수확기 선제적 시장격리와 내년부터 2년간 15만ha의 생산조정제 시행발표가 주효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쌀 수확기가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적정 수요 초과물량을 시장에서 신속히 격리하는 등 선제적 대웅에 요구된다. 또 대형 유통업체들의 할인판매 금지와 수확기 초과 된 쌀에 대한 자동 시장격리제 도입을 서둘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쌀은 결코 공산품처럼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재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쌀 과잉문제를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바라보지 말라는 의미다. 1980년 냉해에 따른 국내 쌀 생산량 급감으로 미국 곡물메이저들이 일방적으로 쌀값을 3배나 높여 판매했던 것을 봐도 그렇다. 지금 당장 쌀값이 하락했다고 해서 ‘식량자급률’, ‘식량안보’ 본질과 책무를 망각하거나 훼손시켜서 안 된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절대농지 규제완화, 농지 전용 등의 발언은 매우 근시안적이며 위험한 발상이다. 오히려 쌀 재배 터전인 농지가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농업생산의 기반이며 미래 세대들을 위해 반드시 보전하고 물려줘야할 유무형의 자산임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현재 전 세계 곡물 소비량은 연간 2%씩 늘어나는 반면 생산량은 0.7% 성장에 그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20년 후에 심각한 식량위기가 올 수도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쌀 문제를 시장경쟁에 방치하지 말고 쌀농사를 짓는 농업인들을 철저히 보호하는 정책을 강하게 펼쳐야 하는 이유다.  

더욱이 농지는 농촌경관과 전통문화 보전, 경관생물 다양성 유지, 물 관리 및 홍수 예방, 수질과 대기 정화 등 막대한 다원적 가치와 공익적 기능을 가졌다. 논과 쌀 산업이 가진 공익적 기능이 연 32조8000억원에 달한다는 농진청 분석결과도 있다. 이에 따라 유엔에서는 2004년에 ‘쌀은 생명이다(Rice is Life)’임을 전 세계에 선포하기도 했다. 

특히 쌀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묘약’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냉각돼 있지만 분명 쌀의 인도적 대북 지원은 우리에겐 쌀 재고를 털어낼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면서 북한에게는 식량부족을 해결하는 모멘트가 될 것이다. 그러니 쌀이 지금 아무리 흔하고 남아돈다고 해서 천덕꾸러기인 것처럼 취급하지 말라. 멀지 않은 미래에 쌀은 분명 또다시 과거의 그 위상과 가치를 복원 받을 것이 분명하다. 자칫 잘못하다간 식량위기라는 쌀의 보복이 일어날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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