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윤 화천귀농학교 교장

모처럼 비다운 비가 왔다. 집 앞 개울에도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얼마 만인 지 모르겠다. 몇 년 전인가 40일 넘어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온 이후 근 5년간 가물다 보니 계곡은 사라지고 냇가는 갈대숲을 이루었다. 지형이 바뀌어 버릴 정도로 날씨가 달라졌다. 이제 기상 이변이 아니라 이런 현상이 일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여름철이면 큰물진다 큰물난다 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였고 동네 사람들과 우산을 들고 다리 위에서 흙탕물이 무섭게 흘러가는 걸 구경하곤 했는데 이제는 다 옛이야기가 되었다.

도시사람들이야 장마가 오고 가뭄이 들고 하는 날씨 이야기가 휴가계획 잡을 때나 문제가 될 뿐이지만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 입장에서는 절박한 일이다. 5월 초에 오는 늦서리를 피하느라 5월5일이 지나 무씨를 뿌리고 고추모종을 정식하고 했는데 서리가 내리는 시기도 당겨진 것 같고 6월의 가뭄에 잘 자라지도 않는 걸 보니 이제 4월말로 당겨 심어 빨리 키워야 할 것 같다. 

농부에게 절박한 가뭄대책

올해도 군에서는 가뭄대책으로 관정, 스프링클러 등 보조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농사짓는 사람 입장에서야 관에서 가려운 데를 긁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걱정도 된다. 집에서 쓰는 물을 뽑아먹는 것 만해도 만만치가 않은데 논 밭 곳곳에서 저렇게 뽑아 대도 괜찮은 것인지. 이 가뭄에 땅속의 물을 뽑아 감자밭, 땅콩밭, 배추밭에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걸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왜인지. 학교 다닐 때 숲과 산에 나무가 무성할수록 계곡에 물이 풍부해 진다고 배웠는데 이제 우리 산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나무가 무성하고 울창해졌는데 어릴 때 보다 계곡물이 더 줄어들어 가는 건 무엇 때문인가? 나무랑 물이 관계가 없는 건 아닌지, 마구마구 지하수를 퍼다 쓰니까 지하수위가 낮아져서 그런 건 아닌지 모처럼 비오는 날 한가히 누워 있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나저나 내가 이런 생각하고 있어도 되는가? 내 코가 석자인데. 반품해 가라는 무는 어떻게 할 건지? 내년부터 농사는 어찌 할 것인지 내 문제로 들어오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하수 바닥날까 괜히 불안

토양 시료에서 살충제 성분이 나와 유기농 인증이 취소된 이후 걱정해 오던 문제가 현실이 되었다. 계약을 해놓고 무를 심었는데 인증이 취소되어 새로운 출하처를 찾느라 시간을 끌다보니 수확시기를 며칠 놓쳤고, 그러다 보니 뜨겁고 습한 장마철 날씨에 일부 무가 병에 걸린 모양이다. 동네 형의 도움으로 간신히 출하처를 찾아 온 몸을 땀으로 적셔가며 7톤가량 출하를 했는데 마지막 물량에서 병든 무가 발견되어 출하한 무를 몽땅 반품처리 하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계약을 했을 때의 단가보다 너무 낮아서 씨값, 비닐값, 기계대, 인건비 등을 제하고 남는 거나 있을라나 걱정했는데 아예 싹 망하게 되었다. 톤백을 실어 갈 때마다 품질 검사를 했으니 마지막 물량 이외의 무는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을 해보지만 손톱도 안 들어간다. 우리 농산물 만이면 어떻게 싸워 보겠는데 나를 소개시켜 준 형의 농산물도 앞으로 처리해야 할 거라서 대놓고 싸울 입장이 못 된다. 게다가 알다시피 다른 모든 건 제조사, 생산자가 값을 정하지만 농산물만은 생산자가 배제된다. 철저하게 생산자인 농민이 을인 구조이다. 내가 뻗대고 제시하는 조건이라는 게 겨우 이거다. ‘품질 검사를 통과하고 기 출하한 물량에 대해서는 돈을 지급하라’ 가 아니라 ‘반품을 받아들이겠다. 다만, 당신들도 책임이 있으니 내 밭까지 싣고 오는 건 책임을 져라’ 는 거다. ‘그걸 버리기 위해 내가 트럭을 동원해서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건 너무 억울하니 그 정도는 당신들이 하라’ 는 것이다. 어쨋건 이 요구를 가지고 좀 싸워 볼 작정이다. 

지속가능 농민 대책 마련을  

그나저나 무만 문제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 청양고추는 또 어떻게 처리를 할 것인가? 이번 주부터 물량이 나오기 시작할 건데 걱정이다. 관행농산물처럼 가락동으로 보내면 해결이야 되겠지만 도매시장 출하 초짜인 내 농산물에 제대로 된 값을 쳐 줄 리가 없다. 친환경농사라는 게 가치관과 의지의 문제인데 유기 인증이 취소되었다고 그 밭에 농약, 비료를 칠 수는 없는 것이고, 이제 곧 역병, 탄저병이 유행 할 건데 약값, 영양제 값 등 생산비는 일반 농산물 보다 더 높은데 판매 단가는 낮으니 헛농사 짓는 꼴이다. 오죽하면 병에 걸려 싹 죽어서 내 눈에 안보였으면 하는 무서운 생각도 한다. 이렇게 올해는 농사에 아주 정이 떨어지는 해다. 

귀농한 지 13년 농사만 12번째다. 동네 형들에게 소꿉놀이 하는 수준이라 놀림 받던 시절도 있었고, 손가락도 제대로 펴지지 않을 정도로 골병이 들게 일 하고도 건진 건 없어서 아내가 농사를 그만 하라고 말리기도 했지만 내게 농사는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가치관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였다. 1년에 농사로 300만원도 벌지 못할 때도, 귀농학교를 하느라 작물농사 보다는 아스팔트 농사로 바쁜 지금도 내 직업을 소개할 때는 늘 농부라 쓴다. 그런데 이제 좀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농사라는 것이 지속가능성이 핵심인데 우리나라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이 지속가능할까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비가 그치더니 저녁부터 다시 비가 온다고 한다. 세찬 비에 온갖 쌓인 쓰레기와 찌꺼기들이 쓸려 내려가고 깨끗해진 도로를 본다. 이 비처럼 우리네 고민을 싹 쓸고 갈 시원한 소식이 기다려진다. 농민 기본소득제, 농민 직접지불제 등 어떤 방식이든 농민이 농지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농민시인의 시에 있듯이 농사짓고 늙어가다 어느 따뜻한 봄날 산 아래 양지바른 밭에 앉아 일하다 죽었으면, 그렇게 늙어질 때까지 이 땅을 떠나지 않고 농사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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