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섭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언론보도, 학술 문헌, 관청 문서 등 여러 매체에서 어떤 말이 반복 등장하면, 그건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증상이다. 손톱을 물어뜯는 것처럼, 대상의 부재(不在)를 견디는 강박적 행동이자 ‘그 없음을 없애라’는 경고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데 없는 것, 부재 상황은 관형어로 표현되기도 한다. 세계는 당연히 계속 발전하리라는 믿음이 흔들리자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농업은 원래 인간이 환경-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면서 유기물을 추출하는 활동이었다. 그 조화로운 관계가 위태롭게 되자 ‘친환경’ 농업이라는 말이 나타났다. 농업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의 쟁투에 이제 막 끼어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가 있다. ‘사회적’ 농업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개똥철학이 만연한 한국 사회의 위기를 알리는 징후 아닐까? 본디 사회적이어야 할 농업이 더 이상 사회적이지 않게 된 것 말이다.

사회통합 지향하는 농업 실천

그런데 ‘사회적’이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거칠게 말하자면, 사회는 개인의 반대편에 있다. 허름한 츄리닝 차림의 동네 백수 청년 다섯이 골방에 둘러앉아 양은 냄비에 끓인 라면을 나누는 풍경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독재자와 수하들이 저택에서 요리사가 준비한 고급 요리를 먹는 풍경을 상상해보라. 전자(前者)는 비록 궁색해 보일지라도 후자(後者)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더 건강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라면의 풍경은 그 풍경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면발의 자유와 국물의 평등, 그리고 김치의 박애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김영민, 「봄날은 간다」, 137쪽). 또 다른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농가월령가 3월령이다. “점심밥 풍비(豊備) 하여, 때 맞추어 배 불리소. 일꾼의 처자 권속(妻子眷屬), 따라와 같이 먹세, 농촌(農村)의 후한 풍속, 두곡(斗穀)을 아낄소냐. 물꼬를 깊이 치고, 도랑 밟아 물을 막고, 한편에 모판하고, 그나마 삶이 하니, 날마다 두세 번 씩, 부지런히 살펴보소.” 식(食)과 농(農)이 ‘사회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농업은 본디 사회적이지만, 특별히 ‘사회적 농업’이라는 말을 쓸 때는 범위를 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완벽하게 합의된 정의(定義)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배제된 이들을 사회 안으로 끌어안는 농업 실천을, 즉 사회 통합(social inclusion)을 지향하는 농업 실천을 사회적 농업이라 한다. 가령, 일자리가 없는 이를 농장에서 고용해 영농에 종사하게 하는 실천을 ‘노동통합형 사회적 농업’이라 한다. 정신적·신체적 장애가 있는 이에게 농업의 치료적 요인과 결합된 돌봄(care) 및 치료(theraphy) 서비스를 농장에서 제공하는 실천을 ‘돌봄형 사회적 농업’이라 한다. 직업이 필요하지만 기술·지식 등 능력이 부족한 이에게 혹은 농업이나 농촌을 접한 적이 없는 도시의 아동·청소년 등에게 농사를 가르쳐 직업을 얻거나 농업·농촌을 포함한 전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게 돕는 실천을 ‘교육형 사회적 농업’이라 한다.

사회적 농업은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다. 어딘가에서 어느 농민들이 예전부터 실천하던 일이다. 그런데 이제서야 세상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경쟁, 성공, 성장 등의 말이 낯익으면서도 피곤한 세상살이 지침이 된 지 오래다. 그게 아예 강박이 되어버린 사회의 병증을 다스릴 약이 필요하다는 게, 사회적 농업 담론 확산의 가장 큰 이유일 테다.

경쟁보다 협동, 더불어 살기 지향

경쟁보다는 협동을, 개인적 성공보다는 더불어 사는 연대를, 넘어지지 않으려면 쉼 없이 밟아야 하는 성장의 페달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는 성숙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대열에 합류한 농업이 사회적 농업이다.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는 농장들이 협동조합, 사회적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 경제 조직 형태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물론, 사회적 농업에 대한 말들이 요즘 들어 쏟아져 나오는 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다. 유행어 하나를 내세우고 선점해 일감을 만들려는 여러 집단의 이해관계와 마케팅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지혜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통제해야 할 흐름이다.

농업·농촌과 전체 사회 구성원의 간극이 벌어지다 못해 아예 단절되는 ‘농업·농촌의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려는 시민사회의 실천들이 있었다. 그 사례들에서 얻을 교훈이 있다. 1990년대 후반 참신하게 일어났던 도농교류 운동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 이른바 「도농교류 촉진법」이 제정되었다. 지금 도농교류 운동은 어디에 있는가? 진정성 있는 교류는 온데간데없고 ‘농촌 체험 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금전적 거래, 오고가는 정리(情理)라고는 도토리 모자만큼만 보이는 거래 관계’ 아니면 ‘일방적 시혜에 우쭐대며 자사(自社)의 사회공헌활동 홍보 소재로 써먹는 기업체와 그 앞에서 자긍심을 훼손당하는 농촌 주민’의 풍경이 적지 않다. 근래에 활발하게 확산되는 도시농업 운동은 어떠한가? 2014년 늦가을에 「도시농업법」이 제정되었다. 법제화와 더불어 도시농업 육성 정책이 집중적으로 시행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 처음 들었을 때에는 생소함을 넘어서 형용모순 같았던 ‘도시-농업’이라는 말이 이젠 제법 자연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숨 막히는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보리를 베면서 땀 흘리거나 채소 조금 뜯어먹어서 힐링이 되니 참 좋다’는 식으로 드러나는 소비주의적 감성을 진작시키려는 게 도시농업 운동의 원래 취지는 아니었으리라. 삭막한 도시 공간에서 ‘녹색’을 가꾸어보겠다고 끈질기게 노력한 도시농업 실천가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 수고의 결과가 고작 ‘새롭게 개발된 문화상품’일 수는 없지 않은가?

취지 퇴색시키는 유행 막아야

삐딱한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현장에서 애쓰는 실천가들에게 찬물을 끼얹으려는 심사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실천이 제도나 시장과 연루되는 과정에서 그 운신의 폭을 잃고 당초의 지향도 탈색되거나 오염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제 막 싹을 틔우려 하는 ‘사회적 농업’에 관한 정책 논의는 그런 역설을 잘 헤아려야 한다. 땀방울 떨어지는 밭 이랑 곁에서 정략(政略)과 상략(商略)의 돌부리를 치워야 한다. 새로운 해법, 새로운 형식의 조직,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바탕으로 사회 문제에 대응하는 사회 혁신의 싹이 돋아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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