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윤 화천귀농학교 교장

 

올해 초에 있었던 일이다. 기술센터에서 안내가 와서 면사무소 2층으로 가니 농자재 보조금을 신청하려는 주민들로 북적인다. 여기저기 인사를 나누며 준비된 의자에 앉아 있으니 담당계장님이 올해의 보조금 집행기준에 대해 설명을 한다. 다들 주의를 집중하고 듣고 있지만 무슨 말인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신청방법과 주의사항 등 설명이 끝나고 신청서 작성 시간이 되니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다. 수 백 명의 주민들이 수 십 가지의 보조사업을 각 사업마다 한 개씩 사업신청서를 쓰자니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간접지원 방식의 폐해 수두룩

그것도 평균 나이 60대가 넘는 농사꾼들이 각 신청서 마다 이름, 주소, 필지를 다 쓰고 보조사업 내용을 적고, 농자재의 경우 제품명과 생산회사 이름까지 다 적어야 한다. 게다가 전체 사업비 중 보조금액을 제외한 자부담 금액만큼 일반 거래통장이 아니라 잔고가 0원인 별도의 보조금 통장에 돈을 넣고 그 통장을 제시해야 한다. 

비닐하우스 등 덩치가 큰 시설 자금에 대한 보조사업 신청일 경우는 이해를 하겠지만 매년 이루어지는 퇴비, 친환경자재 등은 어차피 경작면적이나 인증면적에 따라 배정을 하는데 굳이 이런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의문이다.

또한 관에서 주민에게 직접 지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업체에 지불을 하는 것이다 보니 필요 없는 자재라도 받아 놓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은 심정이 되고, 업체는 업체대로 보조사업 대상이 되면 일단 단가를 뻥튀겨 놓는다. 귀농 초기에 생선부산물로 만든 액비가 10L 한통에 1~2만원 했는데 몇 년 후 보조사업 대상이 되니 한 통에 10만원 까지 치솟았다. 그러니 보조가 50% 된다고 하지만 이미 뻥튀기된 단가에 50% 지원을 받아 봤자 업체들 배만 불리게 된다. 결국 지금과 같이 업계에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간접지원 방식은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자재 업체를 위한 일이고, 그 자금을 지불하는 공무원들 어깨에 힘만 넣어주는 일이다. 

세상에 어떤 시설물을 발주 받은 회사가 끝마무리를 하지 않고 가버려도 돈을 받을 수 있는가? 농업인들이 가장 많이 짓는 시설물인 비닐하우스 만큼은 시공업체가 짓다 말고 가버려도 돈을 준다. 비닐하우스의 비닐을 땅에 묻지도 않고, 공사하다 남은 모든 쓰레기도 그대로 두고 그냥 가버린다. 주인이 자부담을 부담했지만 보조금을 관에서 지불하다 보니까 담당 공무원이 요구하는 서류만 맞추면 되기 때문이다. 간접지원 방식의 폐해이다. 그러니 보조사업의 보조금을 농민에게 직접 지불하도록 하자. 

이왕 얘기한 김에 좀 더 짚고 넘어가 보자. 오늘 생협 생산자단체인 우리 영농조합법인 회원들이 유기농 공동인증을 위해 모임을 가졌다. 매년 공동인증을 통해 수수료도 아끼고 서류 작성의 어려움도 타개하고자 하는 건데 해가 갈수록 비용도 더 많이 들고 제출서류도 두꺼워지고 요구사항도 많아진다. 게다가 중간에 품목이라도 변경하려면 또 변경 신청을 하느라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한다. 토양검정, 물검정에 잔류농약 검사까지 포함해서 그 필지에 대한 조사를 했으면 되지 콩 심으려다 옥수수 심는 게 무슨 문제인 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내가 몇 년 간 유기농으로, 무농약으로 인증을 받고 그렇게 관리해 온 필지인데 그 필지에 올해 배추를 심으려다 무를 심는 다고 달라질 게 뭐 있는가? 필지와 품목을 연계해서 인증을 내어주는 건 도대체 누구의 편의를 위해서인가? 어차피 필지별로 친환경 인증을 받는데 그 필지에 들어갈 작물은 내가 뭘 심어도 관계 없어야 한다고 보는데 혹시 정부에서 친환경 농산물 통계를 내는데 편하기 때문에 정작 농사꾼을 괴롭히는 건 아닌가? 

매년 늘어나는 요구사항에 맞춰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농민들이 서류를 작성하는 것도  힘들거니와 매년 농업경영체 수정을 하고, 매년 친환경인증을 하는데도 매년 논, 밭, 조건불리 직불금을 신청해야 하는 것도, 친환경직불금을 신청해야 하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통계가 다 있는데 말이다. 이런 일이야 말로 뽑아내야 할 전봇대가 아닐까? 

농업문제 근본원인 파헤쳐야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는 숙제가 남았다. 다행이 이번 문재인 캠프에서는 최초로 ‘농어민위원회’를 만들어 소외된 농업계의 의견을 받아들일 창구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농업과 농촌의 애로를 해소할 다양한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실현되었으면 좋겠다. 앞에 언급한 보조사업 직접지불 문제라든가 친환경인증 관련 문제든 산적한 현안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개별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헤치는 노력도 있으면 좋겠다. 우리 농민들이 듣기에 달콤할지 모르는 당장 눈앞의 소득문제나 쌀값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시스템의 개선과 농업농촌 기본계획을 장기적 관점에서 형성해 갔으면 한다.

강원도 화천의 시골 촌놈이 일본을, 독일을, 쿠바를 견학해 보았지만 우리 농민들보다 특출하게 뛰어난 농업기술을 가진 사람도, 더 의식 수준이 높은 분들도 별로 만나 본 적이 없다. 선진지 견학으로 가 본 농민직판장도 우리 생협보다 더 낮은 수준이었고, 유명한 독일의 슈베비쉬할 농민조합의 직매장도 우리 하나로마트에 비교하면 특별할 것도 없었다. 유기농 천국이라는 쿠바의 재배면적은 전체 농경지 중 정말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었고 그것도 채소농사에 국한된 것이었다. ‘농민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 애국하는 길은 안전하고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 공급하는 것이다’ 라는 멋있는 말씀을 하신 분은 외국의 유명한 농철학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이해극 농민’ 이다. 

결국 우리나라 농업농촌의 어려운 현실은 우리 농민들의 문제, 즉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농민들의 의식이 낮아서, 준비가 안되어서, 지식이 부족해서, 기술이 없어서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의 농업 농촌에 대한 철학,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시스템의 결여에 있다고 생각한다. 

새정부, 농업농촌 큰 그림 그려야

농민들에 대한 보조가 단순히 소득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와의 불균형을 완화해서 농민이 농촌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나라 전체의 균형 발전과 경관 및 생태계 보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도시 집중으로 생기는 문제도 해결하는 방안이라고 보는 독일의 농업정책.

절대적인 결핍의 시기에도 ‘모든 인간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먹을 권리가 있다’는 전제 하에 사회적 노력을 통해 식량 문제를 해결해 왔고, 이윤 추구의 극대화 보다는 학교 급식에 우선하는 등 안전하고 싼 식량의 공급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지켜 온 쿠바의 정책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큰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이번 정부에서 시작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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