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안

 

보름쯤 전부터 내게 특이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잠자던 감정들이 서서히 깨어나는 것이다. 정서도 마르고 낭만도 잊어버린 예순 나이에 맞은 봄이거늘, 어쩌자고 사춘기 소녀처럼 이리도 마음이 싱숭생숭한지….

그날 저녁나절에 나는 <한국농어민신문>을 펼쳤다가 <제1회 여성농업인 생활수기 공모전> 요강을 보게 되었다. 수기라면 글재주가 없어도 내게 있었던 일을 그저 담담하게 써 내려 가면 되는 글이 아닌가. 신명 나는 일 별로 없는 촌부의 삶이지만 용기를 내 한번 써 볼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감전이라도 된 듯 내 마음이 지난날로 거침없이 성큼성큼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사춘기 소녀처럼 싱숭생숭

그 후 한 보름째 나는 내 젊은 시절로 돌아가 서성이고 있다. 거기에서 결혼을 앞두고 고민 많던 이십 대의 풋풋한 나를 만난다. 그리고 삼십 대, 사십 대, 오십 대에 이르기까지, 내가 선택한 결정에 책임지기 위해 젊음을 거의 잊고 살 정도로 바쁜 나도 만난다. 어려운 농업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과거의 내 모습이다. 그 많은 직업 중에 나는 왜 하필이면 돈 안 되고 힘든 농사를 생업으로 택한 걸까. 혹시 다른 길을 걸었다면 사는 것이 지금 보다는 좀 수월했을까.

넘치던 열정도 차분히 가라앉고 마음도 다소 너그러워진 나이 탓일까. 아니면 아픈 기억까지도 추억으로 탈바꿈시키는 세월의 힘 덕분일까. 그때는 고단했던 일도 지금은 빙그레 웃음 짓게 하는 추억으로 바뀐 일이 많다.

봄날 찾아온 생활수기 공모

그러나 그 긴 세월에도 추억이 되지 못하고 여전한 아픔으로 남은 기억도 몇몇 있다. 그 불청객은 내가 걷는 길 언저리에 엎드려 있다가 허락도 없이 불쑥불쑥 나의 삶에 끼어들고는 했다.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던 일은 아직도 추억이 되지 못하고 내 가슴을 간간이 찌르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긴 세월이 흘러도 묵직한 통증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그 기억을 추억으로 승화시킬 수는 없을까. 

어쩌면 나는 보름 전에 이미 그 열쇠를 발견한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은 바로 <한국농어민신문>에서 본 <제1회 여성농업인 생활수기 공모전> 요강이다. 너무도 선명해 지울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기억, 내 안에 견고하게 자리 잡아 문득문득 도지는 마음의 생채기, 단단한 그 멍울을 끄집어내어 글로 풀어낼 수 있다면 마침내는 날카로운 기억도 추억으로 가슴에 남지 않겠는가.

젊은시절 기억 돌이키게 해

돌이켜보면 농부로 사는 일은 몸만 고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고운 여성이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이 무너져가던 삼사십 대의 안타까움은 촌부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농사꾼은 무능하다고 보는 많은 이들의 인식은 또 얼마나 우리 자존감에 상처를 주곤 했던가.

그래도 우리는 이 길을 간다. 농사에는 도시인이 모르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어버이가 아닌 사람은 자식 키우는 기쁨이 얼마큼인지 모르듯, 농부가 아닌 사람은 농사의 재미를 짐작도 못 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촌부들에게 넌지시 제안하고 싶다. 남이 볼 때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나날이지만, 내게는 모든 순간이 큰 의미인 내 삶을 잘 정리해 수기라는 그릇에 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어려움 속에서도 농사 재미에 푹 빠져 뚜벅뚜벅 이 길을 가는 우리, 진솔한 우리 이야기를 글에 담아 내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짚어보자. 이 작업이 아픈 기억도 추억으로 바꿔주는 열쇠가 되어 줄 터이니.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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