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3월, 거창군에서는 군수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후보 초청 농업정책토론회가 개최됐다. 후보자들의 농업철학과 농정공약 등을 검증하고자 지역농민들의 의견을 모아 90여개의 요구사항을 추려 제안했던 거창군농업회의소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식량자급률 23%, 국내총생산(GDP)의 농업차지 비중 2%, 호당 경지면적 1.5ha. 우리 농업이 마주하고 있는 현 주소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중국 등과의 FTA 체결이라는 완전개방의 파고는 우리 농업의 현실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농업계 전문가들은 그동안 우리나라 농업의 기초 체력, 다시 말해 농업 기반구축에 대한 투자가 끊임없이 지속돼 왔음에도 계획 대비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중앙 중심의 하향식 농업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보니 실제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이나 사업이 많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이다. 지자체의 예산 부족과 대상자를 선정하지 못해 예산이 불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는 것도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이유다.

이에 중앙 정부의 하향식 농업정책에서 지역 단위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이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상향식 농업정책으로 농정시스템을 전환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앙정부 사업 따르다보니
효율성 떨어지고 현장과 거리  
지역에 맞는 농정 꾸릴 수 있게
상향식 농정시스템으로 전환
농정에 농민참여 제도화를



#중앙 중심에서 지방분권으로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농업에 해마다 적지 않은 예산이 투입됨에도 불구하고 농민들로부터 후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원인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학계의 한 교수는 “중앙 정부나 산하 기관에서 내는 사업계획을 보면 중복된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사업의 연계를 위해서는 필요한 부분이지만 이러한 사업들이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업 보다는 당장 예산을 투입해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는 사업계획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렇다 보니 사업 집행률이 저조해 사업의 통합까지 지적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중앙 중심 농정에서 지역과의 협업, 더 나아가 민간의 참여를 적극 수용하는 형태로 농업정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문이 적지 않다. 이러한 시도는 지자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전라북도의 ‘삼락농정’과 충청남도의 ‘3농혁신위원회’다. 이들 지자체는 중앙정부의 하향식 농정에서 벗어나 협치를 통해 농정을 농민과 지방 중심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농정의 의사결정에 농민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면서 지역 농민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협치 농정은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제, 농업보조금 균등 지급 등의 결과들을 내 놓았다.

여기에 더해 2010년부터 진행돼 온 농어업회의소의 법제화를 기대하는 이유 역시 그동안 추진돼 왔던 일방적인 중앙정부의 하향식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 보자는 욕구의 분출로 해석된다.

다만 이러한 현장 중심의 농업정책 개발에 농민들의 참여를 일상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동안 농민들은 정책의 대상자로 수동적 자세에 있다 보니 직접 농정에 참여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자세를 능동적으로 전환시키고 일상에서 농정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김훈규 거창군 농업회의소 사무국장은 “늦은 감이 있지만 농민들이 주체가 돼 농정에 참여하는 과정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중앙 정부도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이러한 움직임에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일상에서 농정에 참여할 수 있고, 그 참여 속에서 성과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스템이 익숙하지 않아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현장에 맞는 여러 형식으로 출발을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과에만 매달리는 농정

중앙집권적 설계주의 농정은 일단 사업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성과주의와 전시행정을 양산시킬 우려가 크다. 박근혜 정부 들어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식품산업에 창조경제 접목과 유통구조 개선, 농가소득안정, 복지농촌건설, 안전 먹거리 공급, 창의·혁신·현장·신뢰농정 등 6개 항의 세부추진 청사진을 제시했다. 특히 이 가운데 유통구조 개선 5대 방안을 제시하면서 생산자는 5% 더 받고, 소비자는 10% 덜 내면서 농산물 가격의 안정화를 추구하는 선진 유통체계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농가의 수취가격을 5% 인상하고 농산물 가격은 10% 인하해 소비자 부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러한 정부의 장밋빛 청사진에도 불구하고 농산물 유통과 관련된 목표가 제대로 달성됐는지에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생산자들은 무분별한 농산물 수입에 따른 국산 농산물 소비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 여기에는 지난해 시행된 청탁금지법이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은 10%를 덜 내고 국내산 농산물을 구매하게 됐는지에 대한 해답도 명확하지 않다. ‘국내 농산물 가격 폭등’, ‘농산물이 물가 상승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쓸 정도로 걸핏하면 언론을 통해 국내산 농산물 가격 상승을 보도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소비자들도 정부 정책 목표를 체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맞다.

유통구조 개선 대책이 예로 제시됐지만 이와 유사한 사례는 적지 않다. 국회예산정책처는 2016년 예산안 분석에서 ‘가축분뇨처리 공동자원화’ 사업의 예산 절감을 주문했다. 이유는 예산 집행이 연례적으로 부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업규모를 집행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할 것을 권고했다. ‘농업에너지 이용 효율화’ 사업 역시 2016년 예산안 분석에서 농가의 사업신청 부진, 사업포기, 공사지연 등의 이유로 집행률이 저조하다는 지적을 받고 예산 규모 축소, 또는 집행부진 개선 방안을 권고 받았다.  이 사업은 2017년 예산안 분석에서도 사업 실적 저조를 이유로 경제성 평가 등의 재고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대해 현장의 한 업체 관계자는 “정부 입장에서는 예산 확보라는 측면에서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현장의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설정된 목표를 추진하다 보면 오히려 필요할 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나”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김영민 기자 kimym@agrinet.co.kr


●나주시의 ‘민-관 협치’ 실험 / 정영석 기획예산실 정책개발팀장
“권한·재정 실질적 지방이양 시급”


중앙정부 사업에 맞춘 예산 투입 많아
운영비가 지방정부 재정압박 요인으로
지자체 자율성 보장, 농민 적극 참여를

 

2014년 6.4 지방선거를 1년여 앞둔 2013년 봄. 나주지역 농민단체·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이 ‘풀뿌리 지방자치 실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머리를 맞댔다. 나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활동해 왔지만 전국적 현안에 매달리다보니 정작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현안, ‘지방자치’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다.

우선 공부가 필요했다. (재)지역재단의 도움을 받아 ‘나주자치와 협동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공부를 하면서 “농업계와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좋은 정책을 만들어 후보에 제안하고, 그 정책이 지방자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도록 하자”는데 공감대를 모았다. ‘좋은 정책 만들기 나주운동본부’가 구성됐고, 의견수렴과 토론과정을 거쳐 시민사회가 필요로 하는 11개 분야 25개 정책과제를 선정했다. 당시 3명의 시장후보 중 이를 전면 수용하고 정책협약을 맺은 이가 현 강인규 시장이다.

운동본부의 지지선언과 적극적인 당선운동에 힘입어 민선6기 시장에 입성한 강인규 시장은 “정책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들어와 정책 실현을 위해 노력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두 명의 활동가가 시민소통실의 시민소통팀장과 갈등조정팀장으로 들어갔다. 그 중 한 명이 당시 나주농민회 봉황면지회 사무장을 맡고 있던 정영석 팀장이다. 지난해 기획예산실 정책개발팀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올해로 3년째 민-관을 잇는 다리역할을 하며 ‘시민과 소통하는 행복한 나주’ 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아스팔트 농사로 잔뼈가 굵은 농민운동가가 지자체 공무원이 됐다. 어려운 점이 많았을텐데.
-“굴러들어온 돌을 바라보는 공직사회의 불안한 시선과 ‘들어가더니 변한 것 아니냐’는 옛 동지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자리다. 그러니 어렵다. 하지만, 비가 오는데 비를 안 맞으려면 나오지 말았어야 한다. 나왔으면 비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자존심이나, 명분만 내세워선 일을 풀 수가 없다.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일이 되는 방식을 찾는데 집중하고 있다. 공무원들도 안된다고만 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협의하는 자세를 갖는 게 중요하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면 분명히 접점이 생긴다.”

▲민선6기에 들어와 추진된 자치농정의 성과를 꼽는다면.
“우선 ‘농산물최저가격보장제 조례’를 제정해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자체 예산 50억원이 배정돼 있는 상태다. 연내 100억원을 채울 계획이다. 나주형 로컬푸드매장을 만들어 운영 중인데, 현재 생산자 350여명이 참여하고 있고, 일 매출액이 500만~600만원 정도다. 올해 안에 두 번째 매장 설립을 추진한다. 농협과의 협약을 통해 ‘농업인월급제’를 실시, 600여 농가가 혜택을 받고 있다. 농가 생산비 절감을 위해 농기계임대사업소도 7개로 늘렸다. 이 모든 게 정책협약당시 제안한 정책들이다.”

▲지방자치가 시작된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뿌리를 못내리 있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나.
“중앙정부가 사업 수립 권한과 예산을 다 쥐고 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뭘 해보기가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예산이 넉넉하지 않고, 중앙정부 사업에 맞춰 매칭해야 하는 예산이 너무 많다. 게다가 현장에서 필요한 걸 주는 게 아니라 대부분 중앙에서 설계하면 공모를 통해 따오는 방식이기 때문에, 막상 짓고 나면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매년 들어가는 운영비는 지자체의 재정압박 요인이다. 때문에 권한과 재원의 실질적인 지방 이양이 절실하다. 그래야 지자체가 자율성을 갖고 자신의 지역에 맞는 농정을 꾸려갈 수 있다.”

▲농민단체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역량 강화도 필요할 것 같다.
“맞다.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 시청게시판을 보면 조례부터 주요업무계획, 신규시책, 예산 등 시정의 모든 게 다 올라가 있다. 지역유지들이나 사업하는 분들은 이걸 다 보고 와서 ‘자기 예산’처럼 구체적으로 요구를 내놓는다. 농민단체, 시민사회단체도 그렇게 해야 한다. 두 번째는 참여다. 나주시를 비롯해 전국에 있는 모든 자치단체가 각종 위원회를 두고, 시민참여 문호를 엄청 개방하고 있다. 물론 형식적 절차 아니냐고 비판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면, 얼마든지 시정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참여하려면 자기 품을 팔아야 한다. 자기희생과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지는 건 없다.”

▲앞으로 나주시가 농업분야에서 역점을 두고 추진할 과제는.
“민선6기 전반에는 농가 생산비를 어떻게 줄일거냐, 상대적으로 소외된 중소농, 고령농, 여성농업인 등을 위한 정책을 어떻게 만들거냐에 방점이 있었다면 후반기에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생산자와 소비자가 상생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나주 GMO 안전지대 구축사업이나, 공공급식에 우리지역 농산물을 우선 공급하는 나주형 푸드시스템 구축 등이 그것이다. 이미 농산물 시장은 완전개방됐다. 소비자의 눈높이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농산물을 생산해야 농업의 살 길이 열린다.”

▲지역을 바꾸기 위해, 지역농정을 바꾸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예전에 지역공동체가 살아 있었을 때는 농민운동도 잘됐다. 그런데 공동체 기반이 무너지니까 농민운동도 함께 무너진다. 마을공동체를 복원하는 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과 희망을 공유하고, 그 희망을 점차 더 넓혀가는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 지방자치를 통해 이런 일들을 해나갈 수 있다. 관심과 참여만이 지역을, 농업을 바꿀 수 있다.”

김선아 기자 kimsa@agrinet.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