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실장·선임기자

 

경자유전의 원칙은 헌법상 농민의 권리이자 대한민국의 경제체제를 규정하는 원리다. 농사를 짓는 농민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1948년 제헌헌법에서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대한민국이 일제 강점기의 지주 소작관계를 청산하고 농민에 의한 농지소유를 확립함으로써 농민생활의 향상, 국민경제의 균형과 발전을 위해 도입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소작농지 면적은 전체 농지의 68%까지 늘었고,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대가를 지불하는 소작농의 비율은 자작과 소작을 겸하는 자소작농을 포함하면 77.1%에 달했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에게는 일제의 귀속자산 처리, 지주로부터 농민에게 땅을 돌려주는 농지개혁이 최대 과제였다. 헌법과 농지개혁법에 따라 1950년 단행된 농지개혁은 유상매입, 유상 분배였고, 시기가 지연되면서 모든 소작농지를 개혁대상에 포함시키지 못한 한계가 있긴 했지만, 지주제가 사라지고 농민들이 농지를 소유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제헌헌법에 이어 1962년의 개정헌법은 ‘농지의 소작제도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금지 된다’고 다시 못 박는다. 이러한 경자유전은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명문화됐다.

그럼에도 이러한 경자유전 원칙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훼손돼 왔다. 잇따른 규제완화로 농업법인을 통한 대기업의 농지소유가 가능해졌고, 도시민도 농지취득자격증명을 받아 농지를 소유한다. 탈농지주의 농지도 많다. 전근대적인 소작제도가 없어졌지만, 임대차가 늘어 2015년 기준 임차농지 비중은 전체 농지의 51%, 임차농은 전체농민의 60% 이상이다. 농지가 대기업과 비농민의 투기수단으로 되면서 임차농들은 농지를 구하기가 힘든 세상이다. 지주의 갑질에 고통을 겪는 일도 빈번하다. 직불금 욕심에 땅주인들이 임대를 중단하거나, 직불금의 절반을 가져가는가 하면 아예 본인이 차지하는 경우도 생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젠 퇴색된 경자유전의 원칙을 아예 헌법에서 빼자는 얘기가 나온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농민단체에 보낸 의견조회서에서 ‘농촌인구 감소 등 시대상황적 변화를 반영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을 삭제하자는 의견이 있다’며 견해를 물은 것도 이와 관련된다. 그동안 재계와 보수언론이 경자유전 폐지를 요구해온 것을 상기하면, 개헌 판에서도 음습한 자본의 입김이 느껴진다.

헌법은 죄가 아니다. 경자유전 원칙의 훼손 책임은 끊임없이 농지를 투기와 축재의 대상으로 삼아온 세력들, 그리고 헌법가치를 거슬러가며 농지법 등 하위법으로 규제를 완화하고, 세금을 없애준 정부에 있다.

농지는 농민이 소유하고 관리하는 게 사회정의로나, 경제적으로나 맞는 일이다. 농지는 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의 기본적인 생산수단이자 자산이면서도, 다양한 공익적 기능을 갖고 있는 공공재이다. 식량 안보, 환경생태 보전, 휴식 공간 제공 등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경자유전 원칙이 삭제되면 농지를 지키던 규제들은 무력화되고, 지주와 기업(자본)에게 빠르게 넘어갈 것이다. 난개발이 심화되고 식량자급률은 더욱 떨어지며, 농업의 공익적 가치도 상실된다. 지주는 땅을 가지고 있으면 지대를 수취하면서 더욱 땅을 늘려간다. 자작농은 점차 줄어들고 소작농이 늘어 갈 수 밖에 없다. 기업(자본)이 농지를 소유하면 농지를 이윤목적으로 사용한다. 16세기 영국에서 모직물공업의 발달로 양털 값이 오르자 지주들이 농경지를 양을 방목하는 목장으로 만들고 농민들을 쫒아낸 ‘인클로저(enclosure, 종획운동)’가 이를 증명한다. 이윤 앞에 농지의 공익적 기능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반면 농민들은 이윤이 나지 않아도 농업소득이 있으면 농사를 계속 짓는다. 식량안보를 지키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보전하는 이들은 바로 농민이다.

농지는 농민의 것이다. 경자유전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훼손한 것이 문제다. 농촌인구 감소는 농촌을 희생시켜온 정부 정책으로 인한 것이지, 경자유전 원칙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개헌을 할 거라면 오히려 경자유전의 원칙 조항을 유지하고 더욱 강화해야 한다. 나아가 스위스처럼 헌법에 농업이 식량생산뿐 아니라 다원적 기능을 수행하므로 이에 기여하는 농민에게 지불하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 현행 농지관련 법률도 농민 중심의 소유, 이용, 보전의 원칙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 · 개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균형사회를 만들자는 헌법 개정의 목적에 부합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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