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윤 화천현장귀농학교

역시나 이번 설도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차례를 지내는 것을 두고 남녀간, 세대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오죽했으면 50~60대 이상의 남성들도 부모님 생전에야 어쩔 수 없지만 자기 대에서 제사고 차례고 간에 다 끝내고 싶어한다. 돌아가신 조상님을 기리고 시절 음식을 즐기며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즐겁게 놀아야 할 잔칫날이 집안의 갈등을 모두 드러내고도 모자라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날이 되어 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제사와 차례, 풀어야할 어려운 숙제

집안에 풍파가 일어나 부모님이 홀연 가시고 나서 아들 넷에 둘째이던 나는 34살에 상주가 되었다. 굴건제복을 입고 집안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정신없이 따라하다 보니 5일장, 3일장이 지났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제사순서 차례 순서 적어놓은 종이를 보고 몇 년간 지내봤지만 여전히 상차림(진설)과 순서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 해는 추석에 동생네가 상을 보겠다고 해서 제수씨가 차례상을 준비했는데 고기 산적을 쇠고기가 아니라 돼지고기로 올리는 바람에 그것이 시비가 되어 결국 5년여 넘게 서로 발길을 끊었다.

돌아가신 부모님 위한다고 산 자식들이 싸우고 갈라섰으니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그때부터 내게 제사와 차례는 풀어야할 숙제였다. 제사와 차례는 무엇인지, 상차림과 순서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제사는 밤에, 차례는 아침에 모시는 지 등.

어느 날인가 제사 순서를 보다가 문득 죽은 자를 대하는 제사가 산 사람을 대하듯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오시기 전 청소하고, 맞이해서 인사하고, 음식을 대접해 보내듯이 제사와 차례 절차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 다음엔 밥, 고기반찬, 나물반찬, 찌개, 과일, 과자 등 후식까지 올려놓은 제사상 차림이 이해가 갔다. 다음부턴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 무엇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 어떤 절차를 지켜야 하는지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전날 모시는 형태도 원래 돌아가신 날 제일 이른 시각에 모시다 보니 전날 밤 12시가 넘어 지내던 것을, 초저녁으로 옮기면서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고부터는 제사 모시는 시간에서도 자유로워졌다.

이렇게 보니 다른 문화권에서 죽은 자를 추모하는 행사와 우리의 제사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졌다. 돌아가신 날 꽃 갖다놓고 기도드리는 거나 술과 음식 갖다놓고 절 올리는 거나 도대체 뭔 차이가 있나? 상에 올리는 제수도 기본은 돌아가신 분이 살았을 때 좋아하던 음식이 첫 번째요, 제사 모시는 후손들이 먹고 싶은 음식이 두 번째다. 아내는 자기 제사상에 컵라면, 스팸, 당근케익 올려 달라고 애들한테 얘기한다.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내나? 결국 산사람들을 위해 모신다. 죽은 사람 핑계로 살아있는 친척과 친구들이 만나고 준비한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제사는 해월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향아설위(向我設位·나를 향해 상을 차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 종교적 색깔을 덧칠하는 건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

명절은 죽은 사람 아닌 산 사람들 축제

제사가 죽은 자를 추모하는 행사라면 명절은 산 사람들의 축제다. 그 철에 나온 먹을거리를 형편껏 차려 조상과 하늘에 먼저 올리고 참가한 식구들끼리, 친척들끼리, 마을사람들끼리 즐기는 행사다. 설은 새해를 기원하는 떡국을 먹는 날이고, 추석은 송편을 먹고 큰 달을 바라보며 노는 날이다. 다만, 어른들께 먼저 인사드리는 예의를 갖출 뿐이다. 오늘날도 축제를 즐기면 된다. 명절을 욕하고 가부장제 문화가 어쩌고 하지 말고 본가, 처가 다니면서 가족들과 즐겁게 놀자. 음식은 가족들이 먹고 싶은 거 차리면 된다. 우리 집은 이번 설에 돼지갈비를 올렸다. 아내나 제수씨가 그걸 좋아하니까 나나 동생은 별로지만 돼지갈비가 메인 요리로 상을 차지했다.

작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유기농업 관련 연수를 갔다가 달력 표지로도 많이 나오는 작지만 유서 깊고 아름다운 마을을 들렀다. 거기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마을의 공동묘지였다. 낮은 담 안에 모여 있는 묘지를 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깔끔하게 가꾸어 놓은 잔디와 아침에 갖다 놓은 듯 싱싱한 꽃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비석들은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조상들의 산소를 아끼고 관리해 오는 지를 보여 주었다. 주민들이 일상처럼 자기네 산소를 관리한다는 가이드의 얘기를 들으며 항상 외국의 사례 운운하며 조상들과의 끈을 단절시키려 하는 요즈음의 우리 세태가 부끄러웠다.

시가·처가 구분 말고 여성차별 없애야

나는 어머님이 새벽에 찬물로 목욕하고 정화수 떠놓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우리는 북두칠성에 기원하고 태어나 죽으면 북두칠성이 새겨진 칠성판에 누워 묻힌다. 육신은 땅으로 가지만 본체는 다시 왔던 그곳으로 간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죽는다는 것은 곧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삶과 죽음이 단절이 아니라 있는 자리만 달리할 뿐 연결되는 것이다. 누군가 조선시대까지는 평민들이 제사니 차례니 하는 것을 지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삶과 죽음의 철학이 일상의 말에 살아있는 우리 민족에게, 하늘의 자손이요 조상이 하늘의 별에 있는 신(神)인, 그래서 내가 곧 신인 우리 민족에게 하늘과 나를 잇는 의례가 없었다는 것은 망발이다.

조선 중기까지는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를 들었다. 율곡 이이만 하더라도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상속의 권리도 제사 지내는 의무도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다. 친부모이든 시부모, 장인장모 든 모두 부모님이다. 살아계실 때 잘 모시고 돌아가시면 가리지 말고 제사 모시고 명절에는 시가 처가 가리지 말고 재미있게 놀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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