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올 겨울과 내년 봄, 채소 수급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신호가 계속해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 10월 26일 국내 최대 월동채소 산지인 제주에서 만난 농가와 산업 관계자들은 최악의 월동채소 수급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경고를 보냈다. 이와 함께 정부의 선제적 수급대책이 무너졌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런 위급한 신호에도 불구하고 방관하고 있다가 막상 겨울철 수급불안 시 수입산으로 문제를 풀 경우 ‘생산량이 줄어도 가격이 떨어지는 올해산 건고추’처럼 앞으로의 월동채소 산업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생육이 밀리고 밀리는 당근 산지

평년비 생육 두 달 가까이 늦어져
평년 상태 보이는 산지 10%도 안돼
궂은 날씨 탓 생육 회복 감감

▲ 김은섭 제주당근연합회장이 10월 26일 구좌읍의 한 당근 포전에서 겨울당근의 생육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곳은 태풍 ‘차바’ 피해를 입은 뒤 최근 재파종한 포전으로, 생육이 크게 부진했다. 바람에 부러지거나 빗물에 썩은 당근도 많았다.

“저기 비타민 음료병 보이시죠. 원래 평년 같으면 지금 시기 당근 굵기나 크기 모두 적어도 저 정도는 돼야 하는데 실상은 아기 새끼손가락보다 작습니다.”

국내 최대 겨울당근 주산지인 제주시 구좌읍을 찾은 10월 26일. 이곳에서 만난 당근 재배 농민 및 산업 관계자들은 구좌 당근의 생육 상황이 평년 기준이면 9월 초순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제주의 경우 당근은 보통 7월 중순 이후부터 8월 중순 전까지 파종이 이뤄져야 하는데 당시 극심한 가뭄 속에 비가 내리지 않아 대부분의 산지에서 발아가 되지 않았다. 이후 10월 초 태풍 ‘차바’로 인해 그나마 발아가 이뤄진 당근도 큰 피해를 입은 상황. 이에 당근 생육이 예년의 9월 상순에 해당되고, 그나마도 제대로 된 물량이 많이 없다는 것이다.

김은섭 제주당근연합회장은 “발아도 제때 이뤄지지 않았고, 10월 초 태풍으로 인해 그나마 자라던 것들도 바람에 쓰러지고 빗물에 썩거나 뽑혀 나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며 “이를 복구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인력, 자금이 들어가고 있다”고 현 상황을 전했다. 김 회장은 이어 “생육 시기도 너무 늦춰졌다. 예년 9월 초 당근 형태가 이제야 나오고 있다”며 “이 당근들도 끝이 썩은 물량이 많은 등 벌써부터 상품에 문제가 발생해 제대로 자랄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부영배 구좌농협 경제상무는 “평년 이맘때의 상태를 보이는 산지가 10%나 될지 모르겠다. 그만큼 당근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밝혔다.

여기에 본격적인 생육기로 치달을 최근의 제주 지역 날씨가 당근 생육을 더욱더 비관적으로 흘러가게 만들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10월 제주 지역에서 흐린 날을 제외하고 강수량이 기록된 날만도 26일 기준 절반인 13일이나 된다.

부영배 상무는 “그래도 앞으로 날씨가 좋으면 회복할 물량이 나올 수 있는데 최근 계속 비가 오는 등 날씨도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날씨도 이럴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김은섭 회장은 “당근 농사를 1978년부터 해왔다. 그런데 올해만큼 당근 생육이 좋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정말 최악의 상황”이라며 “만일 겨울철 한파와 폭설이 일찍 찾아오거나 2~3일 이상 지속되면 올 겨울 당근 대란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올해 같은 일은 처음이라는 무 산지

추석 이후 물량 30% 태풍에 실종
재파종 들어가 곳곳 땅만 보여
씨앗값부터 시작해 비용 눈덩이

▲ 구좌 일대의 월동무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근 재파종한 월동무 포전으로, 이 시점에 재파종을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얘기다.

국내 월동무 수급의 전량을 책임지고 있는 제주 월동무 상황도 당근 못지않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올해 벌어졌다”는 것이 25년간 무 농사를 해온 최도균 삼다농심영농조합법인 대표의 전언.

제주시 조천읍에서 서귀포시 표선면까지 66만㎡(20만평) 규모의 무를 재배하는 최도균 대표는 “태풍 피해가 우려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다. 보통 제주 월동무는 9월 15일 추석 전 70% 정도 파종에 들어가고, 30% 정도의 물량은 9월 15일 이후 시작해 적어도 10월 3일 이전에 끝내는데 이 추석 이후 30% 물량이 태풍에 완전히 휩쓸려 갔다”며 “이 물량이 모두 재파종에 들어가 지금 산지를 둘러보면 알겠지만 땅만 보이는 곳이 많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아무리 못해도 10월 5일 이전엔 파종이 마무리돼야 하는데 올해는 10월 15일까지 재파종을 한 곳이 많았고, 최종 10월 21일까지 파종을 했다”며 “이들 무가 제대로 버텨줄지 겪어보지 않았기에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전했다.

재파종으로 인해 씨앗 비용부터 시작해 들어간 부수비용도 많다. 최 회장은 “2만1000평 정도를 심을 수 있는 씨앗 한말 값이 700만원, 여기에 수용성 테이프값이 700만원이 들어 2만1000평을 재파하는 데 사실상 ‘씨앗 값’만 1400만원이 들어간다. 여기에 인건비, 비료비 등 재파종으로 인한 추가 비용도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렇다고 추석 이전에 파종한 물량이 완전한 것도 아니다. 최 회장은 “추석 이전 파종한 무는 재파를 할 정도로 휩쓸려가지는 않았지만 유실되기도 했고 바람에 흔들려 무에 상처가 많이 나 상품성이 떨어진 물량이 많다”고 밝혔다.

무 역시 앞으로의 상황도 녹록지 못하다. 최근의 제주 날씨가 흐린 날이 많아 일조량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최도균 회장은 “25년 무 농사를 해왔지만 10월 초 이후에도 파종을 한 게 올해밖에 없다”며 “제주 월동무는 제대로 자라지 않은 시점에 낮과 밤의 길이가 바뀌는 동지(12월 21일)를 만나면 안 되는데 올해는 그렇게 될 물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월동무는 제주 지역에서 전국을 모두 소화하는데 올해 월동무 수급에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장에선

“사후약방문식 대책 나올 것” 불신
수입산으로 부족분 대체 우려 
선제적 수급대책 마련 목소리 고조

 

“선제적 수급대책을 한다고 하더니 지금 월동채소와 관련해 정부의 어떤 대책이 나오고 있는지, 또 산지에 와보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물량이 부족해 시세가 급등하면 그제야 수입산으로 부족분을 채우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월동채소 산지에서 만난 농가와 관련 산업 종사자들의 우려감은 절정에 달했다.

한 월동채소 농가는 “월동채소 수급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파종기였던 여름철 극심한 폭염과 가뭄이 지속됐던 시점부터 제기됐고, 10월 초 태풍 이후 극에 달했다”며 “그랬으면 재파종을 독려하거나 씨앗값 등에 대한 지원비가 나왔어야 했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 지원하면 추후 수급대책으로 인한 비용보다 비용이 훨씬 덜 들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결국 사후약방문식 대책이 나올게 뻔하다”며 “설도 있고, 겨울철 우리의 주요 먹거리인데 너무 월동채소를 안일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 재파종한 월동무와 겨울당근의 현재 생육 상태. 당근의 경우 비타민 음료병 정도가 평년 수준이지만, 한눈에 봐도 생육이 크게 부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일한 태풍 피해 대응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모 채소 농가는 “태풍이 10월 5일 지나갔는데 피해 신고를 15일까지 받았다”며 “농가들은 무너진 산지를 살리고 재파종을 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10일 만에 신고를 하라고 한다. 뿌리채소는 땅 속에 박혀있기에 수확 이후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안일한 피해 대응”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수급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수입 물량으로 문제를 풀려 하지 않겠느냐는 푸념도 들렸다. 한 당근 유통 종사자는 “예전엔 이 지역 당근 재배 면적이 1200만평(3960만㎡)에서 1300만평(4290만㎡) 정도 돼도 충분히 생산 물량이 소화되고, 시세도 괜찮게 나왔는데 지금은 500만~600만평(1650만㎡~1780만㎡) 재배해도 생산에 과잉이 된다고 하고 생산원가도 건지지 못하는 해도 많다. 이게 다 수입산 때문”이라며 “제주산에 베트남산까지 급속도로 국내 시장에 들어오면서 국산 당근은 가정용 외에 설자리를 잃어갔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만일 올 겨울과 내년 봄, 수입산으로 부족한 수급분을 채울 시 생산량이 줄어도 가격이 떨어지는 올해산 건고추처럼 월동채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선제적 수급 대책이 정말 절실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제 월동채소의 중요성을 인식해 중앙 정부 차원에서 노지채소류의 안정화 대책을 마련하고 대응해야 한다”며 “월동채소는 겨울철 우리의 중요한 먹거리지만 재배하는 곳은 제주와 일부 남부권 등 한정돼 있어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크게 어렵지 않다”고 강조했다. 

#취재를 마치며

이날 오전과 오후 각각 당근과 무 재배 현장을 차례로 찾는 동안 제주의 날씨는 오전 내내 화창한 가을 하늘을 뽐내다 오후 들어 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로 바뀌는 등 유난히 변덕스러웠다. 여름철 폭염에 이은 태풍 피해, 여기에 궂은 날씨 등으로 인해 생산 여건은 악조건 속에 속절없이 지쳐가고 있었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이 올 겨울 월동채소 수급 차질이 기정사실화되는 쪽으로 흘러갈 공산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여파는 월동채소 뿐만 아니라 다른 농산물에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수급 대책 마련이 절실해 보인다.

제주=김경욱·고성진 기자 kimkw@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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