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실장·선임기자

 

햇살이 따갑다. 가을 바람이 산들 산들 불어온다 해도, 한 낯에 밭일을 하는 이들의 밀짚모자 아래로는 땀방울이 송송 맺혀 흐른다. 서울 강동구 근린공원 텃밭에 조성된 토종농장. 파아란 가을이 내려앉은 이곳은 수확기를 맞은 도시농부들의 잰 발걸음으로 부산하다. 놀랍게도 서울 한 복판에서 우리 토종곡식과 채소가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아래쪽 텃논에는 천주도, 청송도, 흑저도, 적토미, 자광도, 차지나, 다마금, 백석, 은방주, 졸장벼 등 갖은 토종벼가 익어간다. 위쪽 텃밭으로는 제주 구억배추, 개성배추, 이천 게걸무를 비롯해 조선아욱, 당파, 조선대파, 산파 등 수십 종의 채소가 자란다.

시민들로 이뤄진 단체 ‘강동토종지킴이(회장 박종범, 이하 강토지)’ 회원들이 김매기, 솎기, 채종 등 가을농사로 저마다 땀을 흘리고 있다. 이 단체는 강동구가 운영 중인 토종학교 수료생들이 우리 토종을 지키고 보급하기 위해 2013년에 결성한 모임이다. 명일 근린공원 공동체텃밭에 60여종의 토종작물을 심어 화학비료·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3무 농사를 일군다. 농장 입구에 자리한 씨앗도서관은 200여종의 토종씨앗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데, 필요한 이들에게 무료로 책처럼 대출해 농사를 지어 직접 채종토록 하고, 그 씨앗으로 돌려받는다. “토종씨앗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속담에 ‘농부는 굶어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고 했어요.” 박종범 강토지 회장의 설명이다. 다양한 토종씨앗을 지키고 보급하는 것이 곧 자연과 인간을 지키고 미래를 담보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GMO(유전자변형농산물)의 확산, 생태계 교란, 기업에 의한 종자독점과 토종의 단절에 맞서 우리 씨앗을 지키고 보급하기 위한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토종을 지키는 운동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흙살림, 전국귀농운동본부 등이 나서고 있고,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단체 ‘토종씨드림’의 활동이 활발하다. 충남 홍성을 비롯해 강동구처럼 씨앗도서관을 운영하는 곳도 몇 군데 있다.

씨앗은 먹거리의 시작이다. 토종씨앗이란 오랜 기간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땅과 기후에 적응해 오면서 우리 몸과 입맛에 길들여진 씨앗을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안전하다. 토종의 재배와 소비는 전통과 문화와 공동체를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가는 것이 된다.

토종을 지키는 일은 생태계의 유전적 다양성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를 덮쳐 100만 명이 죽고 100만 명이 해외로 떠난 대기근이 대표적인 예다. 이 지역에서는 주식이던 감자를 한 가지 품종으로만 심었다가 ‘감자마름병’이 돌면서 감자 대기근에 직면했다. 당시 밀과 옥수수 등 다른 작물은 영국 지주들이 본토에 팔아버리는 통에 감자밖에 먹을 게 없었던 아일랜드 민중들에겐 대재앙이었다. 다양한 품종이 심어져 감자마름병에 강한 품종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70년대 식량증산을 위해 정부가 통일벼 재배를 대대적으로 늘렸다가 80년 냉해로 대흉년이 들어 외국에서 2~3배 이상 비싼 돈을 주고 쌀을 수입했던 일을 상기하게 한다. 먹거리를 특정세력이나 국가가 독점하고, 종의 다양성을 해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원래 농민들은 씨앗을 스스로 받아서 써왔다. 이렇게 농민에 있던 종자에 대한 권리와 농사에 대한 결정권, 즉 농부권은 이제 지적재산권과 특허라는 이름으로 종자회사의 독점판매권으로 넘어갔다. 토종이 사라진 자리는 종자회사에 의해 유전적으로 획일화 된 소수의 종자들이 차지했다. 종자회사들이 판매하는 씨앗은 한 번의 수확은 가능해도, 그 씨앗을 수확해 이듬해 다시 쓸 수는 어렵게 만들어졌다. 결국 농민들은 해마다 종자회사로부터 새로 씨앗을 사야하고, 그 씨앗에 좋다는 농약과 비료도 사게 된다.

토종씨앗을 지키는 일은 기업자본에 넘어간 농민들의 권리를 찾고 안전한 먹거리를 담보하는 일이다. 농업의 지속가능성, 그리고 생태계의 미래를 위해서는 종의 다양성이 필요하고, 우리 기후와 토양에 적합한 토종이 중요하다. 토종을 지키는 일은 낡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다. 그래서 토종을 ‘오래된 미래’라고 하는 것이다. 정부는 종자산업 육성이란 이름으로 종자회사만 지원할 것이 아니라 토종을 지키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눈을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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