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식품을 둘러싼 사회적 요구들이 다양해지면서 전통식품 업체의 대응 역량이 생존으로 직결되고 있다. 위생에 대한 소비자 인식은 보다 엄격해지고 있고, 틀에 박힌 전통식품은 소비자의 장바구니 목록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전통식품 업계가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시점이지만, 업계 관계자들이 말하는 생산 여건은 총체적으로 척박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큰 이견이 없다. 그동안 만난 전통식품 업체들의 목소리를 통해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과 더불어 16일 찾은 두 업체의 애로사항을 살펴봤다.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구조적 문제는

생산기반 투자 애먹어도
수익은 받쳐주지 못하고
소비 확대도 쉽지 않아
정부 실효성 있는 지원을

김치·장류 등 대기업 진출
생산영역까지 잠식
가격경쟁 부추기는 데다
중소업체 ‘OEM 제조사’ 전락


▲열악한 생산 인프라 투자 여력=전통식품 업계가 부여받고 있는 사회적 요구는 ‘전통식품의 정체성은 유지하되 일반 식품 수준의 위생·품질 기준을 갖추고, 여기에 소비 트렌드도 반영해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모두 충족했다고 전통식품이 하루아침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일은 만무하다는 것이 전통식품 업체들의 목소리다.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여건 중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 이밖에도 판로 개척 및 신제품 개발, 마케팅 강화, 생산 설비 확대 등 또 다른 투자비용이 수반되는 다른 난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중소 규모가 많은 전통식품 업계의 생산 인프라 투자 여력은 갈수록 열악해져만 가는 상황이다. 업계에 따르면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을 위해 투자를 확대한 업체들의 경우 수익이 받쳐주지 못해 대출 이자조차 갚기 버거운 업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저런 투자로 인해 담보 여력이 없는 업체들의 자금 건전성은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됐다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 업계에선 “수십 년 동안 운영하는 과정에서 빚이 없는 업체들이 없을 것”이라면서 “오히려 빚이 없는 게 경쟁력이 있는 업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렇다보니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사업을 시작한 전통식품 업체들은 당장 노후화된 시설 설비를 손봐야 할 시점임에도 현실적으로 마땅한 방도가 없는 형편이다. 시설 투자를 위한 정부 정책 자금(융자)을 확보한 업체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에 속한다. 투자 요구의 필요성은 높아지고 있지만, 뾰족한 궁리가 나지 않는 현실이다.

이에 따라 전통식품 업계에선 중소 업체들을 대상으로 생산 및 위생 등의 인프라 투자를 위한 정부 차원의 실효성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다. HACCP(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 인증 시설이 보편화되고 있는 데다 생산 시설 역시 노후화돼 이에 대한 지원이 이뤄진다면 업계의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다.

곽승신 한국전통가공식품협회 사무총장은 “현재 융자 지원 형태로 시설 및 포장 디자인 등에 대해 일부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만, 업계 여력이 많이 약화된 상황이기 때문에 시설 노후화 부분 등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직접적인 지원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며 “시설 지원과 관련해 중단된 보조 사업을 재개하는 방안이 검토돼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대기업 중심으로 공고해지는 식품 시장=대기업 중심으로 공고해지는 식품 시장 지형도 전통식품 업계의 생산 여건을 더욱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폐해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전통식품 분야에 대한 대기업의 진출이 가속화되고 있고, 이에 따른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소 전통식품 업체들의 생산 토양이 척박해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대기업이 자체 유통망 계열사(대형 유통업체, 백화점, 식자재업체 등)를 통해 가격 경쟁을 유도하면서 발생하는 수익 저하 문제는 고스란히 중소 업체들의 경영 악화로 연결되고 있다. 더욱이 대기업의 진출 분야가 유통과 급식 분야를 넘어 생산 영역으로까지 커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업계에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김치와 장류 분야가 대표적이다. 김치업체 관계자들은 “수입산 김치를 유통하며 김치 시장에 뛰어든 일부 대기업이 자체 유통망을 통해 저가 가격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데다 최근에는 유통 및 학교급식 분야는 물론 생산 영역까지 잠식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런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거나 또는 전통식품 업체들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정부가 뒷짐을 풀고 적극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기업 진출의 또 다른 문제로 지목되는 것은 중소 업체들이 대기업에 종속된 ‘OEM 제조사’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소 업체들이 생산한 제품이 자체 브랜드 역량이 미흡해 판매가 부진하면서 궁여지책으로 대기업 브랜드를 달고 시장에 나오고 있는 상황. 중소 업체들이 만든 똑같은 제품이 ‘대기업 간판’을 달고 소비자들을 만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업체 수익률은 낮아지고, 대기업과의 거래 물량을 지켜내기 위해선 품질 및 제품 개발 등에 대한 투자보다 상대적으로 대기업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등의 생산 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전통식품 업계의 얘기다.
 

▲ 양평에 위치한 전통 장류 업체 광이원은 청국장 HACCP 인증을 받기 위해 관련 시설을 새롭게 지을 계획이다. 16일 찾은 이 곳에선 장독대 행렬 너머로 보이는 건물을 허무는 공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농가형 장류업체/경기 양평 ‘광이원’
장기적 관점서 HACCP 시설 투자

가업 잇는 딸 위해 큰 결심
자금운영 원활치 않아 애로


광이원은 전통 장류 연구가인 엄마 김광자 원장과 대한민국 조리기능장 자격을 획득한 딸 이보배 씨가 함께 전통 장류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곳이다. 제품 생산에 그치지 않고 요리체험도 진행하고 있고, 양평 최초의 ‘농가맛집’ 인증도 얻어 전통 장류 및 식문화를 알리는 데 적극 나서고 있다.

20여 년 동안 사업을 운영하면서 차곡차곡 늘어난 수백여 개의 장독대에는 2년간 자연 숙성된 된장과 3년간 숙성된 간장 등이 직거래 및 회원제 방식을 통해 공급되고 있다. 양평의 청정한 환경과 장을 담그는 이의 정성이 만나 빚어진 제품들은 좋은 평가 속에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다.

광이원은 올해 청국장 HACCP 인증을 획득하기 위한 시설을 신축하는 데 거액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공사가 한창이다. 오는 10월 말 완공 이후 HACCP 인증 획득 절차를 밟아나갈 계획이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노후화된 시설 문제와 판로 개척 등과도 결부돼 있다.

김광자 원장은 “장류 제품들이 품질과 맛을 인정받아 꾸준하게 팔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제품의 품질만 갖고 홈쇼핑이나 백화점 등에 입점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다. 장류 업체들이 많이 생겨서 가격이나 마케팅 등으로 승부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며 “최근 위생 수준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만큼 당연히 갖춰야 하는 시설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자금 운영 여력 등을 놓고 봤을 때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이 같은 결정을 가능케 했던 데에는 딸 이보배 씨가 가업을 잇겠다는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단기적 수익에 대한 확신은 불투명했지만, 장기적 차원에서 명맥을 잇는다는 측면이 시설 투자를 이끈 셈이다.

김광자 원장은 “하나의 신제품을 연구·개발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다. 어떤 제품은 1개당 2000만원이 소요되기도 한다”며 “수익적인 측면만 놓고 볼 때는 시설 투자가 망설이는 상황이었지만, 딸이 가업을 잇겠다고 해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말했다.

남편 이종학 대표는 “HACCP 신규 인증 외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설이 노후화돼 이에 대한 보수가 이뤄져야 하는데, 여러 루트로 자금을 끌어 쓴 업체들의 융자나 담보 여력이 마땅치 않은 현실”이라며 “이렇다보니 매출로 나오는 자금은 유지 관리 비용으로 땜질식 처방 등에 쓰이고 있는 상황이고, 인건비나 원물 비용 등 고정비용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어 자금 운영이 원활치 않은 상태”라고 토로했다.
 

▲ 강원 원주에 위치한 김치업체 (주)대일은 원물 조달의 어려움, 인력 수급 문제, 중국산 김치 등과의 경쟁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단 이 곳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 홍금석 대표의 얘기다.

#중소 김치업체/강원 원주 ‘농업회사법인 ㈜대일’
소포장 시설 없어 ‘일일이 수작업’

내수시장 한계 직면 벼랑끝
체감할 수 있는 정부 지원을


‘치악산 산골김치’라는 브랜드를 가진 김치업체 ㈜대일은 이상 기후에 따른 원물 조달의 어려움, 인력 확보 차질에 따른 불안정성, 중국산 김치 및 대기업 김치와의 경쟁 등을 애로점으로 호소했다. 이는 대부분의 중소 김치업체들이 갖고 있는 문제라는 것이 홍금석 대표의 얘기다.

2009년부터 사업을 시작한 이 업체는 지역의 김치공장을 인수한 탓에 시설 노후화 등에 대한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염장 등의 공정이 필수적인 김치업체의 경우 다른 분야보다 시설에 드는 비용이 많은 편이다. 또 원물 저장 시설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농가 저장 창고를 임대해 사용하는 곳도 많다.

여기에 중국산 김치와 대기업 김치의 입지가 커지면서 내수 시장은 한계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 만만치 않은 여건에서 수출을 꾀하는 노력도 이뤄지고 있는 현실이다.

홍금석 대표는 “초기 진입 장벽이나 현지 진출 등에 소요되는 비용이 훨씬 많음에도 수출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는 명분을 위한 측면이 크다”며 “내수 시장이 갈수록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정책 자금이나 소비자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생존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이 업체는 강원 지역 김치업체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24일 중국으로 김치 수출 제품을 선적하는 등 일본, 중동, 대만에 이어 적극적으로 수출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열의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수출과 관련한 시설 인프라는 절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이다. 소포장 설비 시설을 갖추지 못해 직원들을 총동원해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번 중국 수출에 참여한 지역 김치업체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홍금석 대표는 “중소 지역 김치업체들의 생산 여건이 곪을 만큼 곪은 상태”라고 표현하며, 중소 김치업체들이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운전 자금 문제가 계속되고 있어 정책 자금 이자도 내지 못하는 업체들도 많다”며 “배추 수매 비축 등의 사업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지역 중소 업체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정부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곳에서 만난 지역 김치업체 ‘하늘농산 영농조합법인’의 김정학 대표는 “지금 시점에서 공장을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김치업체가 20~40% 정도 될 것으로 본다. 영세업체들은 냉장시설이 없는 곳도 있는데, 이런 폭염 속에 배추김치를 팔 수 있겠냐”라며 “결국 국내산 김치 생산이 줄어들면 그 자리는 값싼 중국산 김치가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국내 김치업체들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김치업체인 ‘신동식품(주)’의 강경준 대표도 “포장 및 물류 등에 대한 지원이 현실적으로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며 “포장 디자인에 대해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데, 사실 디자인 고안보다 제품을 찍어내는 비용이 더 많이 든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인데, 이에 대한 지원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성진 기자 kosj@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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