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 논설실장·선임기자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던 11월14일, 전국농민대회와 민중총궐기에 참가했던 보성 농민 백남기 선생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쓰러졌다. 쌀값 폭락에 항의하고 농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이 나라에서 국민으로 살아보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고 머나먼 보성 땅에서 상경한 그다. 나랏님들이 농민에게 했던 약속을 지켜 달라고, 땀 흘린 만큼의 대가를 받게 해 달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언론과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온 그날의 영상이 살인적인 강경 진압의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도를 넘어선 경찰의 폭력적인 대응은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한다.  고압의 물대포와 고농도 캡사이신을 동원한 과도한 진압으로 백남기 선생을 비롯해 수십명의 시민이 다쳤다. 물대포를 시민의 얼굴에 직사하고, 쓰러진 사람은 물론 구조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무차별로 쏘아댄 것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를 따질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농민, 노동자, 시민사회는 이 사태와 관련, 대통령의 사과와 경찰청장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도 경찰을 비롯한 당국은 사과도, 반성도 없이 ‘사실관계를 정확히 따져 봐야 한다’며 며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시위 주도세력과 배후 조종세력, 극렬 폭력행위자는 끝까지 추적해 엄벌하고 손해배상을 물리겠다고 나온다. 정부와 여당은 이날 대회를 ‘사전에 준비된 불법 폭력시위’라며 불법에 대해 필벌하겠다고 부르댄다. 원인과 결과는 뒤집어지고, 사실관계는 앞뒤가 잘려 본질마저 호도된다. 민주주의 후퇴와 민생파탄 문제는 가려지고, 생명의 존엄에 대한 기본적 예의는 사라진 채, 폭력시위냐 경찰폭력이냐를 놓고 진영논리만 부추긴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공권력 행사는 신중해야 하고 통제돼야 한다. 맨 몸의 시민과, 경찰봉·물대포·최루액으로 무장한 훈련된 경찰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다. 

책임 문제에 대한 답은 꼭 10년 전인 2005년 11월 쌀 협상 국회비준 반대 집회 도중 농민 전용철, 홍덕표 선생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숨졌을 때 이미 나온 바 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대통령 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공권력의 과잉진압이 있었다는 조사결과를 내놨고, 경찰은 조사결과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에 나서 “인권위의 권고에 따라 정부는 책임자를 가려내 응분의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절차를 거쳐 국가가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한 번 더 다짐하고 또 교육을 강화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발표했다. 허준영 당시 경찰청장은 임기제였지만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노 대통령은 폭력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스스로 조성한 것임에도 경찰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불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국민여러분과 함께 공직사회 모두에게 다시 한 번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올해는 마지막 미개방 품목이던 쌀시장 마저 정부가 완전개방한 해이다. 정부는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이 요구하는 대책 대신 물대포로 그들의 외침을 날려버렸다. “불법생명이 없듯 불법시위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삶에 대해 요구할 수 있습니다. 죽음에 맞서 저항할 자유가 있습니다. 고통의 몸부림에 대해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지르는 공권력이 폭도입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예배에서 그의 쾌유를 기원하던 기도의 한 대목이다. 살기 위해 집회에 나섰다 공권력에 쓰러진 이 땅의 농민. 청년시절 유신독재와 신군부에 맞서 고초를 겪었고, 평생을 농민운동으로 살아온 강직하지만, 흙과 생명과 평화를 사랑한 농민 백남기 선생. 그가 기적처럼 눈을 뜨고 가족과 우리 농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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