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전마을 사람들. 서로 보살피고 나누며 단합하는, 마을공동체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1. “혼례 올리던 날. 첫 눈이 내리고 버스 타고 고성리재를 넘는데 버스가 고장이 났어. 차에서 내려 치맛단 잡고 눈길을 걸었어...밤 8시 넘어 마을에 도착해 큰 상 받고 절하고 혼례 올렸어. 열여덟 살 신랑은 이 방 저 방 손님 맞고 들어와서는 정신없이 잠들어버리고, 나는 밤 새 잠도 못자고 기다렸어. 신랑은 어리고, 내가 여기서 저 많은 사람들을 잘 거느리고 살 수 있나. 걱정되고 불안했어.” 정순자(64)/ ‘시집가던 날, 내 인생의 잔치.’

#2. “맏시아주버님 돌아가시면서 빚쟁이들이 집으로 몰려왔어. 조카 넷을 품안에서 키웠는데, 내가 남의 어머니 손에 커 봐서 조카들에게 한 마디도 조심했어. 조카들이 작은 어머니 공덕으로 살았다고 고마워 하니, 힘들게 농사지어 살았지만 삶의 보람이야.” 강순옥(81)/ ‘돌 되기 전에 어머니 돌아가셨다네.’


전쟁 같은 IMF 환란, 
죽음 문턱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
마을 주민들 인생 하나 하나
시집 한 권에 고스란히

 

정겹고도 가슴 아픈, 그래서 심금을 울리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사가 한 권의 시집에 담겼다. 강원도 영월군 북면 덕상리 덕전마을 주민들 이야기다. 덕전마을은 30여 가구 49명의 주민이 건강한 농촌공동체의 원형을 간직하고 오손도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시골마을이다. 시인도 아닌 이웃 촌로들이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기억을 주섬 주섬 이야기 시문집으로 풀어낸 것이다.

덕전마을 이야기 시문집 ‘시집가던 날, 내 인생의 잔치’는 김성달 덕전마을 이장의 제안으로 곡성의 죽곡마을에서 마을시집을 만든 농민운동가이자 시인인 김재형 씨가 마을에 머물면서 농민들의 육성을 채록시로 승화시킨 것이다. 전쟁 통에 죽음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때 남편과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이야기 같이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주민들의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빛살처럼 빨리 변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세상이다. 저마다 살아가기에 바빠 이웃들의 희노애락에 별 관심이 없는 세상이기에 이웃의 애틋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남긴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놀랍다.

“언제부턴가 내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했어요. 마을회관에서 농담조로 ‘형수 시집올 때 어떻게 왔어?’하고 물으면 시집올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막힘 없이 풀어가는 것을 보고, 아 이것을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성달 이장의 얘기다. 덕전마을은 흔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예산 지원 없이 자력으로 이 책을 만들었다.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면, 촌로들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래서 생활 속의 농담을 하나 하나 물어보면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그 농담 속에 담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주민들의 마음을 열어가면서 마을시집이 만들어졌다.

덕전마을은 클 덕(㥁), 밭 전(田)자를 쓴다. 그냥 ‘밭이 큰 동네’로 읽힐 수 있으나, 실상 덕전마을에 큰 밭은 별로 없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 의미를 ‘큰 밭처럼 인심이 후하고 공덕이 높은 동네’라고 해석한다. 서로 보살피고 나누며 한 가족처럼 사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살만한 기틀을 잡았다.

마을 주민 유봉균(62) 씨는 “예로부터 우리마을에 들어와서 다들 잘 됐다. 작은 마을이지만 단합이 잘되고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증언한다. 어른들은 마을 아이들을 자식처럼 아꼈고, 젊은 사람들은 부모처럼 모셨다. 산골이라서 논이 거의 없고 밭농사를 주로 해왔는데, 이제는 쌀보다 수수 등 잡곡의 소득이 높아져 나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은 2008년 강원도의 새농어촌건설운동 우수마을로 선정돼 3500여평의 마을 폐교를 매입했고, 마을기업 사업으로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절임배추 가공공장, 고추냉이 가공공장, 죽염 공장이 있다. 2007년부터 신동아건설과 1사1촌 관계를 10여년 동안 유지해 오면서 전국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이상길 선임기자 leesg@agrinet.co.kr
 

♦덕전마을 김성달 이장

"이번 이야기책이 마을 역사책으로 남았으면"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할까' 질문 품고
시 문집 발간 이어 '마을요양원' 도전

▲ 김성달 이장과 부인 조금숙 씨.

마을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주민이고, 그 주민을 움직이는 사람은 마을지도자다. 마을이 되는 곳에는 먼저 움직여 주민들을 이끄는 뛰어난 지도자가 꼭 있다. 김성달 덕전마을 이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늘 이 시기에 나는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다. 마을에 가서 잠시 그와 함께 하는 동안에도 일 하나를 처리하면 그 다음 일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쁜 일상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남기는, 산골마을에서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른 것도 그런 질문의 소산이다.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오겠다는 생각을 품어 오다가, 올해 마을 이장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책을 만들면서 주민들의 얘기를 듣다보니 6.25를 겪은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 그 이후의 세대와 지금 세대 간의 삶의 고통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덕전마을 마을회관에는 역대 이장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 앞으로는 마을에 공적을 쌓은 분들을 새긴 비석거리도 있다.

“이번 이야기책이 마을 역사책으로 남아 후손들이 과거 이 땅에서 살았던 선조들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리길 바랍니다.” 늘 새로운 생각을 내는 그의 바탕에는 마을과 사회를 이끌어온 선배들의 역사에 대한 존중이 깔려있다.

그가 꿈꾸는 마을의 비전은 마을요양원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농촌의 가장 큰 과제가 고령, 독거노인, 치매노인 등의 노인 문제 아닙니까? 새농어촌건설운동으로 매입한 폐교를 사회적기업 형식의 요양원으로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요양원에는 텃밭을 도입해 노인마다 각각 하나씩 가볍게 농사를 맡게 하면 노인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치유농업과 로컬푸드가 결합된 이상적인 모델이 될 것이란 믿음이다. 

그는 서울에서 살다가 20년 전에 영월로 들어왔다. 농촌진흥청 지원으로 영월군에선 처음으로 ‘산속의 친구’ 농가맛집을 만들어 부인 조금숙(58) 씨와 운영 중이다. 11년째 마을에서 국산콩을 수매해서 메주와 된장으로 가공 판매하는 6차산업으로 마을 소득과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영월라이온스 회장, 영월 농촌관광협의회 회장, 영월동강겨울축제 위원장을 역임하면서도 세경대 호텔조리학과를 다니며 공부하는 학구파다.

“우리 자부담으로 책을 2000권이나 냈으니 이걸 다 팔아야죠. 제작비 손익분기점을 넘기면 부녀회 기금으로 한다고 약속했어요.” 사진을 찍으려는데 부인을 불러다 손을 꼭 잡고 함께 포즈를 취하는 그의 따스한 진심이 읽힌다.

♦채록 작업 맡은 김재형 씨

“밑바닥 슬픔 들어주고 기록하며 함께 치유”

보름여 마을회관 머물며 이야기 듣기
가슴 아픈 얘기에 밤마다 아파하기도

 

“농촌마을은 마을마다 세월호 하나씩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트라우마에 대해 들어주고 기록하고 치유해야 합니다.” 덕전마을 이야기를 채록시로 풀어낸 김재형(51) 씨는 지난 겨울 덕전마을 김성달 이장의 전화를 받고 아무 조건 없이 마을로 달려가 보름간 마을회관에 머물면서 채록시 작업을 했다.

그는 “원래 민초들의 슬픔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들이 가슴 밑바닥에 담아두었던 아주 슬픈 이야기를 채록시로 기록하는 일을 하는 것을 삶의 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채록시 작업을 하는 것은 주로 제주 4.3 희생자와 그 가족들의 얘기에서부터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 모진 시집살이, 말 할 수 없는 가난, 현대사의 시대적 약자와 희생자들이 가진 깊은 슬픔에 대해서다. 이번 책은 그가 만든 세번째 책이자, 채록시 작업으로는 두 번째다. 채록시는 그가 곡성 죽곡마을에서 마을시집을 펴내면서 개척한 장르로, 사람들을 만나 삶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서사적인 내용의 시로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정리하고 창작하는 채록시 작업은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고된 작업이다. “무엇보다 나이 많은 노인들의 슬프고 가슴아픈 이야기들이어서 깊은 감정이입 상태에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많이 우울하고 지치게 됩니다.” 이야기를 들은 날 힘들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그 시간에 자신이 일종의 영매 역할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무당이 병자와 아픔을 공감하고 같이 아프고, 진이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보름 동안 그는 낮엔 이야기를 듣고 밤에는 많이 아팠다 한다.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은 김성달 이장 부부와 정순자 회장을 비롯한 마을 부녀회원들의 보살핌 덕이었다. 부녀회원들은 그가 혼자 밥 먹으면 적적할 까봐 저녁까지 같이 해서 먹고가곤 했고, 함께 어울려 화투를 치기도 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를 ‘도서관, 자전거, 시’라고 했던 이반 일리치의 말 대로 곡성 죽곡열린농민도서관을 통해 농민운동과 지식운동의 결합으로 성과를 거둔 그다. 또 공동체마을학교 운동인 선애학교, 보따리학교 운동을 통해 대안교육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그는 최근 그동안의 모든 지위를 내려 놓고 중국 고전 ‘주역’을 10대와 20대도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는 책을 만들고 있다. 프로필도 ‘동아시아인문운동가’로 바꿨다. “책을 쓰고 있는데, 내가 쓰는게 아니라 생각이 나를 찾아 온다”고 할 정도면 그의 멘탈이 점차 경지를 넘어서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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