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중앙대 명예교수, 전 농림부장관)

1970년대 말 등장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담론은 그 용어에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마치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고 빈곤을 퇴치하며 만인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이론이나 정책인 것처럼 오해되어 왔다. 적어도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지구촌을 발칵 뒤집어 놓을 때까지 그랬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스티글리츠 교수 등 세계의 지성들이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기까지 30여년이 걸린 것이다.

시장 실패, 국가 실패, 국민의 실패

1997-2000년의 IMF 환란 위기로 자의반 타의반 신자유주의 체제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여전히 돈 지상주의와 승자독식이라는 신자유주의 프레임 속에 매몰돼 있다. 자유시장과 자유무역 만능주의는 집요하게 옥석 불문의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추동하고, 초국경 대기업들에 의한 산업·금융시스템의 독과점적 지배의 결과 계층간, 지역간 불평등이 증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마침내 시장실패(market failure), 국가실패(state failure)에 더하여 국민실패(democracy failure)를 야기시키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사회양극화 현상을 몰고 온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 실패는 주지의 사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경영마저 세월호 참사 등 잇단 재해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저마다 사람들은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장 실패, 국가 실패 현상의 유일한 대안으로 국민투표에 의해 올바른 대의정치체제를 복원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최근의 잇단 선거 결과 여전히 수구 보수 기득권세력의 승승장구 현상을 보면서 일찍이 토마스 베브랜이 개탄한 약자들의 비굴한 ‘현상유지 불안감’이 고착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 결과 정작 민주와 민권, 민생마저 파탄 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 무역의 자유, 자본의 무한한 탐욕 추구의 자유, 금융과 송금의 자유만을 의미하게 됐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계층간 지역간 불평등과 갈등으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게 된 것이다.

골고루 잘 사는 지속가능한 공동체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래서 안전할 권리, 선택할 권리, 알아야 할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교육을 받을 권리, 문화와 예술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이 땅위에 존재한다.

태어나고 기른 어버이가 다르다고, 또 태어나고 자란 곳이 다른 지역이라고 소싯적부터 차별받고 배척당하고 불이익 불평등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 권문세족과 재벌의 자녀 어느 누구라고 사람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부리고 ‘갑질’을 할 권한을 태생적으로 부여 받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간에 서로 배려하고 공정히 대하고 모셔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진다. 그 책임이 모든 구성원 각자에게 있지만 특히 지도자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은 사람이 대자연과 공존공생하면서 골고루 잘 사는 지속가능한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다. 1퍼센트를 위한 승자독식의 체제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만인이 공생공영하는 협동사회이어야 한다.

땅도 살리고, 하늘도 살고, 사람도 함께 살리는, 생명체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생명의 길이어야 한다. 태어날 때부터 부와 지위가 천양지차인 차별의 사회가 아니라, 서로 간에 의지하고 상부상조하는 균형사회이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인류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이상이며 가치이다.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

원 자유주의경제이론은 근대경제학의 원조, 아담스미스(Adam Smith, 1723-1790)가 ‘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함으로써 시장의 자유화 정책을 맨 처음 이론화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시장의 자유를 골자로 하는 「국부론((1776)」을 저술하기 훨씬 앞서 그는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이라는 경제윤리서를 먼저 출간했다는 사실은 덜 알려져 있다.

도덕감정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연민과 동정심 또는 공감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보고 그 아픔을 생생하게 함께 느끼는 감정이다.” 바로 이 도덕감정론이 시장경제 자유화 정책의 근간이 되어야 했다.

아담 스미스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둘러봐도 완전한 질서, 완전한 평화가 실현된 적이 없으며 범죄와 분쟁과 전쟁이 없는 시대 역시 없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면 어떤 인간의 어떤 본래적 성질이 인간에게 법을 만들게 하고 그것을 지키며 사회질서를 이끌어 내게 할까?

피도 없고 살도 없고, 영혼과 양심도 없는 냉혹한 자유시장 경제 처방을 내리기 전에 먼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자 초기 자유주의 학자들이 제시한 것이 바로 「도덕감정론」이다. “공감과 신뢰, 협동과 연대, 사회정의와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 자애심과 페어플레이 정신, 수익환원과 사회공헌 활동” 등등 오늘날 서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 협동정신이 자유주의 시장경제 활동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교시를 담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사회 역시, 서로 다른 모습, 다른 지위, 다른 의견을 갖고 있더라도 더불어 화합하는 ‘부동이화’ 정신이 인간 천성에 그 기본골격을 이루어 왔다. 맹자는 “사람에게 ①측은한 마음(惻隱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요, ②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③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며, ④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是非之心)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정신 역시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다름을 존중하며 공정한 참여와 공정한 경쟁, 생태적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아우른다. 이해가 상충하고 갈등이 첨예화 하더라도, 당장에 합의하기 어려운 서로 다른 주장과 의견일랑은 뒤로 남겨 놓고, 같은 생각과 같은 것부터 함께 찾아 나가는 존이구동(存異求同)이 그 해법이다.

다른 한편, 일찍이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서구사회를 유심히 들여다보더라도 3C 원리가 생활화가 되어 있음을 이내 알아 볼 수 있다. 상호간에 이견(異見)과 갈등이 첨예할수록 ① 마주 앉아 먼저 상식(Common sense)에 입각하여 함께 판단해 보고, ②이견과 갈등의 실체를 찾아내어 해결해 보려는 꾸준한 토론 (Conference)을 반복하며 서로 접근을 시도한다. 그래도 계속 이견이 남으면 ③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고 타협(Compromise)하는 3C의 원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이 “나도 살고 너도 살리는” 이른바 상생의 윈-윈 정신이다.

지역의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

우리 사회 주변에도 갈등해소와 상생의 성공사례가 적지 않다. 사회공동체 내와 공동체 간의 협동 사례로부터 도·농 상생, 도시 소비자들과 농어촌 생산자들 간의 꾸러미 연대, 지역(지방자치단체) 간의 상생 등 그 사례가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지방자치제도가 우리 사회에 정착돼가는 과정에서 지자체간, 지역간의 협동과 상생의 노력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기도와 강원도, 광주와 전남, 서울과 지방자치단체 간의 상생협력은 참으로 주목을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규모는 작더라도 기초자치단체 끼리의 대소사업과 활동에 긴밀한 협력을 탐구하는 움직임은 갈등을 넘어 상생으로 가는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그 사례는 차츰 늘어나고 있다. 지면의 제약상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다만, 충청북도 지사를 지낸 이원종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장이 4월20일자 주간 ‘새뜸’에 기고한 ‘전남이 행복한 이유’ 기사에서 전남과 광주 두 지자체가 각자도생(各自圖生) 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상생의 하모니를 만들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 프로젝트를 발굴한 사례를 열거하면서, “지역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라고 한 말이 아직도 귓전에 맴돌만큼 진지하다. 이낙연 전남지사가 지역상생(지역 서로살림) 포럼에서 ‘지역상생기본법’ 제정을 제안한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탁견이었다.

이러할 때, 상생의 무드를 깨뜨리는 신자유주의적 효율주의 발상이 바야흐로 중앙과 지방 자치단체 간의 갈등과 국론분열을 야기하고 있어 적잖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앙정부 핵심부서가 오래전부터 만지작거리던 ‘수도권 규제완화 정책’이다. 심지어 수도권에 U턴하는 기업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내용도 속이 비친다.

가뜩이나 대한민국 기업경제의 70-80%가 집중되어 있는 수도권을 더욱 비대화하겠다는 발상은 사회적 비용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효율주의가 아니다.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고 가뜩이나 어려운 비수도권 지방경제를 위축시키며 국론을 양분시키겠다는 ‘나 혼자 살 테니 너희는 죽어라.(Live and Let Die!!) 하는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아무리 규제완화 일변도의 신자유주의에 탐닉돼 있는 중앙정부라 하더라도 차마 하지 못할 짓이다.

모름지기 지역간 계층간 서로살림의 정신과 전략을 모색하는 첫걸음은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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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지난 6월4일 서울시청 대회의실에서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을 비롯, 전국의 20여 광역 및 기초 지방자치단체장들이 모여 “지역상생포럼”을 발족하였다. 이 글은 창립식에 초청되어 발표한 필자의 기조발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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