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가 풍년이다. 시기를 잘못 타고 나서 예초기로 베어나간 배추밭도 있다. 전국적으로 물량 조절이 어려운 배추농가에서는 작년에는 노래를 불렀지만 올해는 죽을상이다. 가을땡볕에 잘 자란 배추포기는 어른 품으로 한 아름씩이나 커버리고 저마다 풍년이라고 절임배추 주문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감자를 캐고 난 밭에 비가 와서 밭을 못 만들어 마을에서 제일 늦게 배추를 심었다. 배추밭이 버스정류장 앞이고 농사에 관심이 많으신 어르신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배추가 김장을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우리 집 김장이나 하는 수준이 아니고 700평 넓은 배추밭이라 마을사람들의 초관심사다. 우리 배추밭을 두고 농담 좋아하는 형님들은 내기도 걸었다. 그러나 걱정하던 모든 사람들의 기도가 모아진 건지 예상을 뒤엎고 이름도 당당하게 유기농배추로 거듭나게 되었다. 농사는 여럿이 함께 짓는 것이다. 하늘이 도와주어 가을비를 자주 내려주었고 기온도 따뜻해서 살이 통통 올랐다. 밭가로 작은 배추는 고춧가루 보내는 친구에게도 몇 포기 덤으로 넣어주고 언니들에게도 한 박스씩 넣어 보냈다. 모두가 상품이었으면 아마도 배추를 들었다 놨다 했을 것이다. 아주 작은 배추라 마음 편하게 쿨하게 못난이 무와 함께 보내주고 나니 부자농부다. 이 맛에 농사짓지 친구랑 지인들과 나누는 재미로.

올해 같은 풍년에 배추와의 전쟁도 무리 없이 이겨내서 전량 다 절임배추로 팔려나갔다. 노란떡잎도 없이 진딧물도 없이 예쁘게 자란 배추덕분에 일도 쉽고 마음도 가볍다. 많은 노력과 애착을 가졌기에 수확의 기쁨이 더 달달하다. 일도 쉬웠다. 동네 청년들이 셋이서 달라붙어 배추 따는 일을 도와줬다. 나는 자르고 두 명은 덮어놓은 부직포를 개키고 두 명은 차에 싣는 일을 나누어서 했다. 아침참으로 오뎅국 따뜻하게 끓여서 막걸리 한잔에 귀농한 후배의 요즘 이야기도 들었다. 상품은 모두 절임배추로 실어 보내고 못난이들은 집으로 데려왔다. 김장을 많이 해서 나누려한다. 맞벌이하느라 바쁜 오빠네도 친구네도 보내주려고.

못난이 쪽파를 뽑아오는데 솔정지댁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계시다 그게 뭐냐고 물으신다. 할머니께서 다듬어주신다고 부르시길래 평상에서 전을 폈더니 쪽파를 까서 가지런히 모아주신다. 해는 기울고 마음이 급해진 나는 덜렁덜렁 놓는데 할머니는 툇마루에 고무신 닦아 놓으신 것처럼 가지런하다. 그래야 일이 쉽다고.

할머니는 옛날에 쌀이 귀해 김치국도 끓이고 김치죽 쑤느라 항아리로 그득그득 넘치게 김장을 했단다. “요새는 십남매 다 나가고 두 늙은이 뭐 먹을 게 있나. 열폭만 하면 돼. 그것도 남어.”
아이들 도시락 싸고 쌀을 늘궈 먹으려고 김치죽을 쒀서 점심을 먹었으니 반양식이었지 불과 3~40년전의 일일 것이다. “그때가 좋을 때여. 농사 많이 지어서 곡식 쌓아놓고 김장 해놓으면 겨울을 났지. 고구마 삶아서 애들 점심먹이고. 죽을 똥 살 똥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지금은 한심하지 내 땅을 두고도 남 주고 도지 받아먹고 있으니.”

할머니 시집온 이야기부터 농사짓고 애들 키운 이야기 듣다보니 쪽파한소쿠리가 다 까져서 뽀얗게 웃고 있었다. 들어도 또 들어도 재미나는 옛날이야기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언니 오빠들한테 들어서 짐작으로도 가능한 그림 같은 이야기들을 어르신들 돌아가시기 전에 담아내야겠다. 이 재미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까? 한분 한분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서 귀한 우리들의 옛날이야기를 그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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